4Q 실습시험에 밤새고 시달린 후에 집에와서 잠시 컴터를 하다가
우리대 동기의 블로그를 갔다가 이 글을 접하게 되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예과 2학년때도 일부 봤던 글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제 본과에 와서 다시 보게되니....
새삼스럽게 더 와닿고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원문은 서울대게시판쪽이었던듯 하지만,
긴 세월이 흐른 만큼 어느 홈페이지의 구석에 갈무리 되어 잠자고 있던 글을
긁어와서 정리해 둔 글을 다시 퍼와서,
많은 사람들이 한번 더 읽어보기를 바라며....
나도 하나씩 하나씩 읽어보며
내 생각들을 정리해 봐야겠다.
4Q의 시작점에서.... 2006.12.12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12일(토) 15시59분55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 : 재수 없는 윤경이
학교 생활을 하다보면 유달리 재수가 없는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내 실험 파트너였던 '강윤경'이 그랬다.
본과 1학년 생화학 실습 - 페놀에 의한 단백질 변성 실험을 하다가 마우스피펫으로 페놀을 빨아올리던 윤경이를 누가 툭 쳤다. 그 순간, "꼴깍" 소리와 함께 윤경이는 페놀을 쭉 들이마시고 말았다.
"앗, 큰일났다. 이거 독성이 대단한데..."
옆에 계시던 서정선 교수님께서 위협적인 한마디를 던지고는 조교에게 'gastric rubbage'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별거 아니다. 물을 많이 먹인 뒤 토해내고, 또 물을 먹이고... 를 반복하는 일종의 위세척) 그러는 동안 부지런한
staire는 독물학 책을 도서관에서 들고 와서...
"페놀... 여기 있다. 들어봐, 살균 및 소독제로 쓰이는 맹독성 화합물. coaltar를 증류하여 얻는다. 복용시 격심한
복통과 현기증, 신경장애를 수반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며, 위궤양등 국소적인 부식을 일으킬 수 있다..."
"꿀꺽, 웩, 그만두지 못해!" (요건 계속 물을 마시고 토하며 staire를 쏘아보는 윤경이의 처절한...)
본과 2학년 미생물학 실습 - Salmonella typhi(장티푸스), Vibrio cholera(콜레라),
Neisseria gonorrhea(임질균)등등 무시무시한 균을 다루는 긴장된 실험중에 경이는 'Mycobacterium
leprae'라고 씌어 있는 시험관을 집어들었다.
"야, 마이코박테리움 레프리가 뭐하는 균이니?"
"몰라, 별거 아닐거야. 과자 먹어..."
과자를 집어먹으며 실험은 계속되고... 균이 든 액이 윤경이의 손에 몇방울 흘렀지만 흔히 있는 일이라 그냥 쓱 닦아버리고 또 집어먹고...
그때 한 녀석이 그 '마이코박테리움 레프리'의 정체를 알아냈다.
"윤경아. 그거 '나균'이래..."
"나균??? 에엥!!!! 문둥병?"
... 다행히 아직도 윤경이가 소록도로 떠났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본과 3학년 내과 실습 - 윤경이는 모처럼 신이 났다. 환자들은 윤경이같이 귀엽고 쬐끄만 실습생에겐 고분고분하지 않은 법인데 웬일로 말잘듣는 환자를 만난거다.
"신난다. 진단학 책에 있는 건 뭐든지 다해봐야지."
"야, 먼저 차트부터 봐야지."
"환자가 기다린단 말야. 나중에 볼께."
환자와 데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윤경이는 날아가는 듯 병실로 사라지고...
거의 1시간이 지나서 윤경이는 병실을 나왔다. 병력 청취, 청진, 복부 촉진과 타진, 게다가 항문 검사와 외성기 검사까지
해치우고 찐득한 손을 닦으며 흡족한 표정으로... 그리고 나서 그 환자의 차트를 읽다가 윤경이는 인턴에게 물었다.
"여기 VDRL +++라고 있는데 이게 뭐예요?"
"Venerial Disease Research Laboratory... 매독 항체가 엄청 많다는 거로군. 그 환자 다룰 땐 조심해... 단순히 과거에 매독을 앓은 적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
만 활동중인 매독일지도 모르니까."
윤경이는 차트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괜찮아. 우선 부인과나 비뇨기과 선배 찾아가서 매독검사해달라고 해봐..."
staire가 열심히 위로했으나...
"아앙, 안돼... 쪼끄만 기집애가 어떻게 매독검사 해달라고 선배를 찾아가..."
... 그로부터 7년이 지나 윤경이는 과친구 명규 녀석과 얼마전에 결혼했다. 명규는 알고 있을까? 윤경이의 과거를...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12일(토) 19시51분50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2 : 시험, 시험...
생화학 3번째 퀴즈 - 그때는 전철 4호선이 없어서 staire는 113번을 타고 등교했다. 근데 저분이 누구신가?
생화학 박상철 교수 아닌가... 황급히 외면했지만 '오, 강군!' 하고 부르시는 바람에 옆에 앉고 말았다. 초치기를 해야
할 이 금쪽같은 시간에 ...
"오늘 생화학 시험이지? 공부 많이 했나?"
"예.. 뭐 그냥..."
"혹시 이거 알고 있나? fxvh gfvf sde jy ssdeg?"
- 전혀 처음 듣는 얘기
"모르겠는데요..."
"그럼 혹시 이건 아나? @#$# &^^^%^& *^ @!#$?" - 이것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이런 식으로 30분간 시달린 끝에,
"자네, 그래가지고 어떻게 시험을 보겠다는 건가? 좀 제대로 하게."
"죄, 죄송합니다..."
staire는 풀이 죽었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건 전화위복일 수도 있다. 강의실로 들어가자마자 마지막 review를 하던 애들을 향해,
"비상! 비상! 박상철 교수의 일급 비밀을 알아냈어..."
교수님이 내게 던지신 10여개의 질문들, 시험에 나오리라고는 꿈도 안꾸던 것들에 대한... 학생들은 아연 긴장했다. 보던
노트를 덮고 각자 분담해서 책과 노트를 뒤져 모범답안을 만들고, 그걸 외우고... 북새통끝에 우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문제지를 받았다.
아니, 그런데... 어쩌면 하나도 안나오다니... staire는 교수님이 원망스럽기 이전에 시험이 끝나면 내게 몰려들 친구들의 분노에 찬 주먹과 발길질 생각으로 문제가 제대로 보이질 않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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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학 기말고사 - 요즘은 없어졌지만 생화학 교실의 당시 전통은 '엎어쓰기 시험'. 범위는 무조건 처음부터다. 따라서
기말고사때면 봐야 할 노트 두께가 웬만한 생화학책보다 더 두껍다. (화학 전공자들은 아시지요? Lehninger나
Stryer 두께를...) 며칠밤을 새웠는지, 멍한 머리로 시험장에 앉아 있다가 그만 엎어져 자고 있던 staire는 누가
뒤통수를 때리는 바람에 놀라 일어났다.
세상에... 나를 때린 것은 어느새 들어온 조교가 나누어주는 두툼한 시험지뭉치...
객관식 600문제, 주관식 30문제로 시간은 4시간... 각 장마다 이름과 학번을 쓰는데만도 10분은 족히 걸리는
'생화학 festival'이 시작되었다. 객관식은 OMR 카드. 처음엔 생각을 좀 하면서 시작하지만 나중엔 (100여 문제
풀고 나면) 사인펜으로 직접 찍게 된다. 한사코 카드를 바꿔주겠다는 조교들의 과잉친절과 (?) 제발 혼자 있게 해달라는 학생들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고...
누가 손을 들고 묻는다.
"담배 피워도 돼요?"
"맘대로 해..."
재용이 녀석도 손을 들었다 (현재 중앙병원 내과 李모 박사 - 김지미의 부군 되시는 - 밑에서 레지던트 수업중)
"도시락 까먹어도 돼요?"
"알아서 해..."
조교는 무표정하다. 재용이는 김치 냄새를 피우며 시험을 보고...
조교들이 하는 제일 중요한 일은 컨닝 감시가 아니다. 엎어진 애들을 깨우며
"잠 깨, 시험 봐..."
"10분만요, 10분..."
staire는 시간이 부족해 객관식 마지막 한 페이지를 포기하고 말았다. 시험지를 걷는 사이 재빠르게 카드에 점을 찍는다. 전부 5번.(5지선다에선 5번이 제일 많아서 5번만 찍어도 적중율이 30%가 넘는다...)
드디어 시험을 마치고 staire는 옆에 앉은 기환이에게 물었다.
"마지막 장에 5번 많이 나왔니?"
기환이는 눈을 둥그렇게 뜬다.
"마지막 장은 OX 문제라서 1, 2번만 쓰는 거야..."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12일(토) 21시57분51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3 : 외과의 검객들
이 글에서의 외과는 일반 외과 (General Surgery) 이며 정형, 성형, 신경, 흉부외과등은 제외되었습니다.
뜯어넥토미 최국진 교수 - 의학 용어로 -ectomy는 무엇을 잘라낸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gastrectomy는 위절제수술, 정관(vas defernce)을 잘라내면 vasectomy. 그럼 아시겠죠? 뜯어넥토미가 뭔지... 교수님의 수술 장면은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입니다. 다른 분들이 꼼꼼하게 혈관을 하나하나 찾아 묶으며 잘라내는 데에 비하면 이분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손으로 뜯어냅니다. 그런데도 완치율은 최고를 자랑합니다. 밤에 폭음을 하시 고는 다음날 아침에 멀쩡한 모습으로 집도를 하시며 같이 마신 학생들을 아연케 하시는 분도 바로 이분입니다.
이식 수술의 대가 김수태 교수 - 백발이 성성한 외모와는 달리 젊은 레지던트들을 질리게 만드시는 끈기의 소유자. 이분의 간이식 수술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간이란 놈의 문제점은 혈관이 너무 풍부하다는 것 - 조금만 베어도 피가 줄줄 흐릅니다. 김교수님의 간 자르는 모습은 개미가 갉아내듯이 1mm 자르고는 전기로 지지고 또 1mm 자르고... 7,8시간이 걸리는 마라톤 수술을 하고 있노라면 젊은 레지던트들은 나가떨어지는데 이분은 바위같습니다.
강의실의 무법자 이?? 교수 - 죄송합니다. 성함을 잊어먹었군요. 이분의 수업은 공포 분위기.
"어이, 거기. 눈똥그란 여학생."
은경이는 움찔했습니다.
"저... 눈 안똥그란데요... "
"그럼 니 눈은 세모꼴이냐, 이 *년아. surgical infection이 뭐야?"
이쯤 하면 알던 것도 더듬게 마련인데 불쌍한 은경이는...
"surgical infection(외과적 감염) 이란... 저... 외과적으로 iatrogenic하게
(의사의 잘못된 치료가 원인이 되어) 감염을 일으키는..."
"그럼 외과 의사가 병을 만든다는 거야? 이 나쁜년아."
다른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교수님의 시선을 애써 외면합니다. 마치 자신의 동그란 눈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써지칼 인펙션은 외과적 처치가 필요한 감염이야. 알았어?"
이분의 또다른 이야기. 이건 우리 후배들이 당한 일인데요, 어느 운나쁜 녀석이 수업시간에 졸다가 걸렸습니다. 교수님이 불같이 노하신 건 당연하고... 한참동안 그녀석을 야단치시던 교수님의 마지막 한마디 -
"그옆에 여학생이 더 나빠. 옆에 남학생이 졸면 깨워줘야 할 거 아냐. 그게 바로 '내조'라는 거야!"
JP 생활영어 김진복 교수님 - 지금은 어느 분인지 모르지만 제가 본3일 때 이분께서 외과 과장이셨습니다. 독재적 성격 때문에 JP라고 불립니다만...
수술장에서 툭하면 인턴을 때리시는 버릇이 유명하고(이때문에 제가 팔자에 없이 환자의 배를 바느질한 일이 있습니다만 이건 이담에 '잊을 수 ㅇ없는 수술'편에서 소개하죠) 이분의 방에 가보니 책상머리에 '오늘은 수술장에서 화내지 말자'라는 액자가 가 붙어 있더라는 좀 믿기 어려운 얘기도 있습니다. 이분의 걸작은 역시 'JP 생활영어'. 환자 앞에서 우리말로 얘기하면 환자가 들어서는 안될 말까지 듣게 된다고 해서 늘 영어를 쓰신다는 소문... 그러나 그걸 못 알아들을 환자가 있을까 하는 수준이라는...
JP의 회진에 참가한 저는 소문의 진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정확한 소문이더군요. 한치의 과장도 없는. 환자 앞에서 교수님께 보고를 드리던 주치의(레지 1년차)가 약간의 허점을 보이자 대뜸 교수님의 대갈 일성(大喝 一聲)이 터져나왔습니다.
"유 메이 킬 더 페이샨트!!! 캄 투 마이 룸!!!"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13일(일) 11시16분07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4 : 잊을 수 없는 수술
앞에 소개한 JP의 수술...
환자는 췌장암 3기.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다. 원래 몸속에 있는 대부분의 장기(腸器:organ)는 serosa라는 막이
싸고 있어서 암이 퍼지는 걸 어느정도 막아주는데 유독 식도하고 췌장(이자) 그리고 십이지장 일부, 대장 일부는 이게 없다.
그래서 암이 발견될 때쯤엔 이미 늦은 경우가 흔하다.
이 환자도 배를 열자마자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다. 의사의 입장에선 도로 꿰매어 버리고 싶은 순간이다. 면밀한 검사를
거쳤음에도 발견 못한 암조직이 뱃속에 좁쌀을 뿌려 놓은 듯이 깔려 있는 거다. 당연히 수술장 분위기는 엉망진창...
(참고로 수술장의 모습을 조금만 알려드리죠. 수술대 주위에는 집도의, assistant 1 (레지),
assistant 2 (레지), 인턴, 전담 간호사, 마취의등 5명이 기본이고 그밖에 circulating nurse와 학생들이
있습니다. circulating은 수술에 참가하는 건 아니고 조명등 위치를 조절하거나 사람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는
등의 잡일을 합니다. 학생들은 대개의 경우 그냥 주위에 둘러서서 구경하는 게 고작이지만 경우에 따라 손을 쓰게 될 때도
있고. 신장 이식등 특수한 수술은 추가로 몇명이 더 필요하지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JP는 강의와 수술을 동시에 한다.
"췌장을 자를 때 덕트(pancreatic duct:이자액의 통로가 되는, 췌장 한가운데를 지나는 관)는 따로 묶고 자르는 거야. 이렇게..."
JP의 손놀림은 악기를 연주하는 듯 우아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좀 굵은 정맥이 잘린 거다. (원래 그곳에는 정맥 같은 건 없는데. 일종의 가벼운 기형인 셈이다.
원래 수술 전에 혈관 조영 사진을 여러각도에서 찍어 이런 건 다 확인하는데 놓친 게 있는 모양이다.) 시야는 금방 벌겋게
물들고 만다. 환자의 혈압이 떨어지는지 마취의사의 손놀림이 급해진다. 수혈이 시작된다.
"Blood 2 pint 들어갑니다..."
상기된 듯한 마취의사의 목소리.(이분은 여의사인데 마스크를 벗으면 꽤 예쁜 얼굴일 것같지만 한번도 맨얼굴을 본 적이 없다.) 2파인트는 적은 양이 아니다...
헌혈할 때 한번에 0.75 파인트정도 뽑으니까...
"모스퀴토..."
간호사가 모스퀴토(작은 지혈겸자)를 JP에게 건넨다. JP는 간호사 쪽은 보지도 않지만 간호사는 JP가 내민 손바닥 위에 쓰기 편한 각도로 모스퀴토를 얹어준다.
역시 한치도 흔들리지 않는다.
"보비... 아니 덱슨."
보비(전기 소작기)로 지져버리기엔 너무 큰 혈관이라 덱슨(봉합사의 일종)으로 꿰매는거다. 간호사는 반달 모양의 바늘(검은
덱슨 봉합사가 끼워진)을 물고 있는 니들 홀더(날없는 가위처럼 생긴 바늘 집는 집게)를 JP의 손에 딱 붙여준다.
Assistant 2는 진공 튜브로 피를 빨아내고 assistant 1은 JP가 한땀 한땀 뜰 때마다 실꼬투리를 한손으로
묶고 (날아갈 듯 빠르다. 베테랑급 외과의는 1분에 80-100개의 매듭을 '예쁘게' 묶어낼 수 있다.) 다른 손으로
실끝을 자른다. 한손으로 어떻게 묶냐고? staire를 만날 기회가 있으면 보여드릴텐데...
"디버 좀더 당겨..."
음... 문제가 발생했다. 디버(배를 가른 자리에 걸고 당기는 기구. 조금만 째고도 넓은 수술 field를 확보하기 위해
쓰인다. 많이 쨀수록 환자의 몸에 스트레스가 많이 가게 되므로 조금만 째고 힘껏 당기는 게 원칙...)를 들고 있던 인턴이 잠시
멍하니 서있었던거다. 설마 조는 건 아니겠지만 외과 인턴은 고달프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선채로 맛이 가는 수가 있으니...
JP는 이런 장면에선 용서가 없다.
팔꿈치로 퍽 소리나게 인턴의 옆구리를 때린다. (손은 쓸 수가 없으니...)
"이새끼 바꿔!"
circulating 두사람이 급히 달려와 staire에게 수술복을 입힌다. staire는 팔을 들고 서 있으면 된다.
연두색 가운형의 수술복은 뒤에서 묶도록 되어 있어 staire는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되는 거다. 준비실 벽에 붙은
수도꼭지(역시 손을 쓰지 않도록 페달식으로 된)에서 소독액으로 손을 씻고 장갑은 circulating들이 끼워 주고 마스크도
역시 circulating이...
"멋있네요. 잘하세요..."
circulating 한명이 내 등을 밀어 수술대 쪽으로 보내며 격려의 한마디. 이 꼴이 뭐가 멋있다고...
인턴이 빠져나간 자리를 staire가 채운다. 수술의사들은 어깨를 바싹 밀착하고있기 때문에 좌우의 의사들이 모두 땀에
젖어 있는 걸 금방 느낀다. 내 오른쪽 어깨에 단단히 밀착된 건 무서운 JP의 어깨... 디버를 힘껏 당기고 있자니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JP는 학생에겐 관대하다.
"조명을 가리지 않도록 손을 낮추고..."
이순간엔 JP의 한마디가 곧 성경 말씀이고 수령님 교시인 거다.
마침내 혈관이 잡히고 수술이 끝났다. 피도 몇파인트 더 들어갔고... 이제 배를 닫는 일만 남았는데... JP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쑥 빠져나가는 바람에 staire는 넘어질 뻔했다. 마스크를 벗고 투덜거리며 사라지는 JP... 그러자
assistant 1도 뭐라고 중얼거리며 빠져나간다. assistant 2, staire, 그리고
간호사와 마취의만 남았다.
"닫아야죠."
간호사가 우리를 재촉한다. staire로서는 처음 맞는 상황인지라 assistant에게 기댈 수밖에.
"선생님께서 닫으세요. 전 학생이라..."
이때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assistant의 대답.
"전 외과의사가 아니에요..."
세상에... 바느질 배우려고 어제 피부과에서 파견된 레지던트였던 거다...
이래서 두 초보의 위태로운 운전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간호사가 자상하게 이끌어준다.
우선 복막을 꿰매고 다음엔 근육층, 마지막으로 피부를... 당기거나 밀리지 않게 길이를 재어가며 한바늘 뜨고 묶고, 또
한바늘... 바늘을 직접 손에 들고 하는 게 아니라 니들 홀더로 물고 있기 때문에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
눈치를 슬쩍 보니 피부과 레지던트도 악전고투중이다...
마취의사가 심전도 모니터를 보더니 아트로핀 주사기를 집어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한마디.
"대충 해요. 깨어날 것같지도 않은데..."
그러니까... JP가 초보들에게 맡기고 나가버린 건 그때문이었군. 그렇다고 대충 할 수는 없지. staire가 살아 있는 사람을 꿰매는 첫 무대인걸...
바느질이 끝났다. 간호사는 돌아앉아 거즈 갯수를 확인하고 있다. (수술중에 뱃속에 집어넣는 거즈는 모두 일련번호가 붙고
대충 위치가 기록된다. 나중에 집어넣은 역순으로 꺼내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한조각 남기고 끝나는 수가 있어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고 십중팔구는 재수술이다.) circulating들이 환자를 수술대에서 stretcher(바퀴달린 침대)로 옮기고
마취의사가 스트레처를 회복실로 밀고 간다. 회복실은 마취의사만의 세계다...
그 환자가 깨어났는지 나는 모른다. 사실 깨어났건 말건 결과는 그게 그거다.
staire에게 있어서 그분의 의미는... 시체에 비하면 살아 있는 사람의 피부나
근육은 부드러워서 꿰매기 쉽다는 걸 가르쳐 준 것 정도일까?
이상, 기계쟁이 스테어의 첫 수술 일기였습니다.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13일(일) 14시15분25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5 : 즐거운(?) 산부인과
Part 1. 내진은 이제 그만!!!!!
여학생들은 비뇨기과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모양이지만 남학생들의 산부인과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staire도 예외가
아니어서 산부인과 실습 첫날은 전날 저녁부터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였지... 변명같지만, 사실 의대를 다니며 내가 잃은
것 중 제일 심각한 건 젊고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여성의 몸에 대한 신비감'일거다. 맨날 보는 거라 귀한
줄(?)을 모르게 된다.
처음 내과 실습을 할 땐 여자 환자를 청진하기가 민망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호흡기 청진이야 등쪽에서 하면 되니까 브래지어끈만 적당히 치우면 되는데 순환기 내과는 앞쪽에서 해야 한다. 혹시 대학병원에서
실습 학생에게 청진을 받아 본 여성은 알겠지만 이녀석들, 가슴을 무지 만지작거린다. 그건 무슨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청진
포인트를 찾는 동작인거다. 예를 들어 삼첨판(우심방-우심실을 연결하는 밸브) 소리를 들으려면 흉골(가슴뼈) 왼쪽 모서리의
4번째, 5번째 갈비뼈 사이에 청진기를 대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갈비뼈를 센다는 게 이만저만 헷갈리는 게 아닌지라 본의아니게
가슴에다 실례를 하게 되는거다. 물론 2주일정도만 실습을 하면 한번에 척 갖다댈 수 있다. staire의 경우도 황당한
순간이 한두 번 있었다. 예를 들어 청진 포인트를 찾긴 찾았는데 그곳에 하필이면 젖꼭지가 떠억 버티고 있는 경우...
나중에는 한손으로 방해물(?)을 쓰윽 밀어붙이고 청진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지만...
얘기가 엉뚱한 데로 좀 샜는데... 하여간 밤잠을 설친 staire는 아침 일찍 산부인과 외래 진료부를 찾았다. 같은 조의 윤경이는 태연한 모습... 당연한 일이지만.
외래 환자는 어떤 이유로 왔건 내진(손가락을 집어넣어 여성 생식기를 촉진하는것)을 하는 게 기본이다. 내과 환자는 무조건
청진을 하는 것과 같다. staire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손을 씻고 또 씻으며 복도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을
둘러본다. 근데 좀 많군. 수십명은 되겠네. 저 많은 사람을 점심 전에 해치워야 한다...
"장갑은 써도 좋지만 가능하면 맨손으로 하는 게 감각이 더 세밀해. 환자의 입장에서도 이물감을 덜 느끼고..."
"예 알았습니다."
드디어 첫 환자가 들어왔다. 몇가지 질문을 거친 뒤 침대에 눕는다...
(적당히 상상해보시오....)
12시 50분, 배고프고 졸린 staire는 아직 환자가 20명 가까이 남았다는 얘길 듣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은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퉁퉁 불었다.
"젠장, 오늘따라 웬 환자가 이렇게 많아... 오후엔 실습 강의도 있는데 점심은 언제 먹지..."
그날 staire는 확실히 알았다. 산부인과 의사가 환자를 가지고 어쩌구 했다는 얘긴 믿을 게 못된다는 걸.
Part 2. 부인과 수술장에서
여고생의 배가 불러 온다면 부모들의 입장에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불운한 여고 1학년 지영이(가명)의 경우가 그랬다. 엄마는 임신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다그쳤지만 본인은 죽어도 아니라는 거다.
"자네들 같으면 무슨 검사를 하겠나?"
이진용 교수님의 질문. 임신 테스트는 여러가지가 있다.
"혈청검사요."
"초음파는 어때요?"
"호르몬 검사... 아이쿠!"
틀리긴 다 마찬가진데 staire는 교수님 바로 옆에 있었다는 죄 때문에 호되게 한 대 쥐어박혔다.
"한심하긴... 우선 hymen(처녀막)이 남아 있는지 봐야 할 거 아냐!"
공돌이도 그렇지만 임상 의학에선 '돈'을 무시하면 안된다. CT(Computerized Tomography : 단층
촬영)같은 비싼 검사는 꼭 필요할 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의료비 부담을 감당 못한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는 악덕
의사도 적지 않기에 의료보험 수가 결정에 말이 많은 거지만...
물론 처녀막 유무가 결정적 증거는 아니다. 쳐녀라도 처녀막은 상할 수 있고 드물지만 성행위를 경험하고도 처녀막이 온전한
경우도 있는 거다. 물론 처녀막 재생 수술(hymenoraphy)을 받은 경우라면 숙련된 의사의 눈엔 다 걸린다...
"산부인과에서 hymen을 볼 기회는 많지 않으니까 잘 봐두도록... 내진은 신중하게. 멀쩡한 hymen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글쎄... 그게 그렇게 쉽게 손상되는 거였나? 하여간 staire는 그 말많은 hymen을 직접 보고 만져보는 영광을 얻었다.
지영이는 처녀였다... Hymen 앞뒷면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상처나 흉터가 없는지 확인한다. 재생 수술을 받았다면 이 단계에서 걸린다. (물론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잡아내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며칠 후 검사 결과가 나왔다. 양성 난소 낭종(ovarian cyst). 왼쪽 난소만 발병. 오른쪽은 정상. 아주 다행스러운
케이스다. 모녀간의 오해도 풀렸고. 곧 수술 일정이 잡혔다. 부풀어오른 낭종을 떼어내기만 하면 된다. 물론 한쪽 난소는 잃겠지만
하나 더 있으니까... 지영이는 웃음을 되찾았고 모든 게 잘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수술장. 이진용 교수님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배를 열어보니 악성인거다. 한쪽을 떼어내도 5년 이내에 나머지
한쪽에서 재발할 가능성이 높아 난소 2개를 모두 떼어내야 한다. 자녀를 낳을 만큼 낳은 여성이라면 두말없이 그렇게 한다.
하지만 지영이는 남자 손 한 번 잡아본적이 없는 여고생이다. 어떻게 불임수술을 해줄 것인가?
"이럴 땐 어떻게 하죠?"
"흠... 우선 한쪽만 떼어내고 빨리 결혼해서 아기를 낳은 후에 재수술을 해야지."
"그 사이에 재발해서 수술 시기를 놓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이런 경우엔 보호자가 선택하도록 되어 있어. 안전하게 둘다 떼어내거나 아니면 한쪽만 떼어내고 서둘러 결혼시키거나..."
그래서... staire는 보호자 대기실로 뛰었다. 보호자가 직접 수술장에 와서 상황을 보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선 아직도 의문이다.
비전문가가 수술장에 와서 보면 뭐하나? 하지만 의료관계 법규가 그렇다니...
지영이 어머니는 수술장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걸 차마 어떻게 제눈으로 보느냐고... 한쪽만 떼어내도록 하자고는
하셨지만 법규고 뭐고 한사코 안보시겠단다. 이거 문제다. 보호자가 안 오면 수술을 시작할 수가 없는데 한없이 마취시킨 채
내버려둘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지영이 이모가 대신 들어가기로 했다.
매일 보는 사람에겐 별 것 아니지만 지영이 이모에겐 그랬을 리가 없다. 자기 조카딸이 배를 열고 시뻘건 내장을 드러내놓고
있는 걸 보시더니 그만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당황한 학생들이 서둘러 부축해서 모시고 나가야 했다...
지영이는 꿋꿋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퇴원 전날 밤, 지영이의 병실을 찾았다. 내일 아침이면 헤어지는 거다. 물론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하겠지만.
"퇴원하면 금년에 결혼해야 한대요. 엄마가 중매 알아보신대요..."
"잘 될거야 걱정마..."
"지금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하고 몇 달 후에 결혼하는 거 싫어요..."
지영이의 눈에 눈물이 비친 것같았다. 침침한 조명 아래에선 알아보기 힘들 만큼 아주 조금.
"나... 선생님하고 결혼하면 안될까?"
staire는 지영이의 싸늘한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무척 작고 가냘픈...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한참만에 staire는 지영이의 손을 놓고 말했다.
"푹 쉬어."
더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거다.
몇 년 후에 지영이가 예쁜 공주님을 낳았고 대학생 엄마가 되어 정신없이 바쁘게 지낸다는 얘길 들었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1시21분38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번외) : 정신과 예습 시험
(오늘은 주말도 아니고... 짧은 글을 번외로 올립니다.)
정신과 실습은 첫날 예습 시험을 치릅니다. 여기서 성적이 나쁘면 재시를 봐야 하고...
정신과는 여타의 분야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른 관계로 이 시험의 필요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기본적
증상(echolalia, confabulation, disorientation...) 이나 흔히 쓰는
약제(haloperidol, valium...)들에 대해 한번쯤 봐 두는 건 주말을 희생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의대의 다른 시험들도 그렇듯이 '족보'를 심하게 탄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특히 괄호넣기 문제가 압권인데... 문제는 상식적인 내용이지만 웬만한 상식으로는 풀기 어렵습니다. 한 번 자신의 상식을 테스트하고 싶으시다면
다음 문제들을 풀어보세요. ( 정답은 다음에 올리지요.)
1. 환자나 가족들을 면담할 때에는 환자 자신이나 환자의 가족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도 주의해야 하지만 __________________ 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2. 무엇때문에 병원을 찾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_________ 에 왔는가 하는 점도 알아보아야 한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1시25분18초 KST
제 목(Title): 윗글의 정답.
1. 대수롭지 않은 것
2. 왜 이 때
자신이 생각하신 답과 비슷한가요?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4시18분18초 KST
제 목(Title): 의대 시리즈 6 : 1987.11.24. Telepathy
기억에 남을 곳들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르는 서러움 중에서도 각별한 종류의 것이 아닐까 싶군요.
저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Telepathy란 cafe가 없어지고 그곳엔 다른 이름의 식당이 들어섰는데...
1987년 11월 24일 화요일 저녁, 제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그 반짝이는 순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보람된 여행이
되시길...
우리 부모님 세대에 있어 법대와 의대가 주는 의미는 특별한 것같다. 그분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본의아니게 의대생이 된 수많은
친구들... '본의아니게'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 의사로서의 길에 적응해가며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staire는
진심으로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싶다.
연(가명)이의 경우도 그랬다. 내가 연이를 만난 것은 1987년 봄, 이제 방향 전환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이 굳어져가던 본과
3학년이었던 staire는 서클 (SNUMO : SNU Medical Orchestra) 신입생 중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연이를 발견했다. 긴 머리에 커다란 눈, 소녀적 분위기... 세째딸이었던 영이의 세화여고 문예반 후배 연이는 곧 staire의
네째딸이 되었다.
잠시 '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같은데 staire는 매년 한두 명씩 마음에 드는 후배를 딸로 삼는 버릇이 있다. 오늘까지도 이 습관은 계속되고 있어 현재 16명의 귀여운 딸들이 자라고 있는 중...
여름방학을 즈음하여 staire는 연이가 더이상 딸일 수만은 없게 된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연이는 이미 과 친구 민기(가명)와 사귀는 중이었고 staire로서도 공대로 옮기는 문제가 급한 처지여서 뭘
어떻게 해볼 입장이 아니었다. 답답한 중에staire는 연이에게 트럼프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5년에 걸쳐 배운 어려운
점을 연이에게 가르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지만(곧 의대를 떠날 것이므로) 연이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따라왔다.
"클로버 J는?"
"Ominous Black Jack. 점장이의 실수나 시간적 불일치를 나타내는 조심해야 할 카드에요."
"스페이드 Q?"
"Black Lady. 영국의 메리 여왕을 상징하고 냉혹한 여성을 나타내는 불길한 카드."
"하트 7?"
"Diana. 질투를 나타내는..."
물론 연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빠는 자기 점은 안치세요?"
"점이란 카드를 돌리는 규칙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냐... 점치는 사람과 점장이와의 마음의 대화가 열쇠야. 같은 패가
나와도 점장이의 느낌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은 달라지지. 그렇지 않고 패만 읽어내는 점이라면 컴퓨터로 뽑는 2000원짜리
점과 다를 게 없어. 그렇기 때문에 solitaire는 어려운거야. 자신의 문제를 읽어내야 하기 때문에 자꾸만 사심이 끼어들게
되고 너무 좋게만 해석하거나 너무 나쁜 쪽으로만 몰고 가게 되거든..."
"제가 잘하게 되면 아빠 점 꼭 봐드릴께요."
글쎄... 하지만 넌 아마 내 점을 제대로 칠 수 없을거다. 내가 마음을 꼭 닫아걸고 있을테니... 이런 말이 입밖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연이는 뭔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점은 카드뿐 아니라 관상과 손금, 점성술까지 얽힌 것이어서 카드
없이도 웬만큼은 읽어내는 종류의 것이고 또 연이는 아주 총명한 제자였으니까.
여름 방학때 관악에 들렀다가 도서관 앞에서 민기와 팔짱을 끼고 걸어오던 연이를 만났다. 전혀 어색한 구석 없이 그들은 밝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했다.
staire는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하루를 보냈다.
SNUMO 여름 캠프. 되도록 연이를 멀리하고 있었던 어느날, 우리 학년 bassoon 중신이가 내게 말했다.
"연이 그앤 좀 이상해. 내가 술을 한잔 주는데 한사코 안받는거야. 주위에서 '여자가 아무에게나 술을 따르는 건
안되지만 받는 건 문제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를 않아... 네 딸이니까 네가 한번 얘기해봐. 나야 아무래도 좋지만
그래가지고 앞으로 의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야."
캠프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staire는 연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날의 술자리가 화제에 올랐다.
"중신이 오빠가 싫어서는 아니에요. 하지만 아직 전 누가 주는 술잔을 받아본 적이 없고 그래서 제가 받는 첫잔만은 의미있게 받고 싶었는데... 그런 분위기에선 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럼 누가 첫잔을 주었으면 좋겠니? 민기?"
"아빠두... 그앤 아직 어리잖아요."
연주회날, 커다란 비올라를 들고 있는 연이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연주회가 끝나고 민기가 준 꽃다발을 들고 웃는 연이가 staire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연주회 after가 있던 앰브로시아(국립극장 근처의)에는 테이블마다 샴페인이 한 병씩 마련되어 있었다. staire가 병을 들었다.
"자, 한잔씩 따라줄테니 각자 자기 잔을 확보해둬..."
staire는 연이가 다급하게 자기 앞의 잔을 두손으로 감싸쥐는 것을 눈여겨 보았다.
마치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하듯 두손으로... 그날 staire는 연이에게 첫잔을 준 남자가 되었다...
(이거 생각보다 길어지는군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5시21분07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前承)
C.S.Lewis의 예쁜 동화책이 있다. "The Complete Chronicles of Narnia"라는...
staire는 그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Narnian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책은 아닌 모양인지
staire가 아는 Narnian은 많지 않다. 그 책의 첫권은 "사자와 마녀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출간되었지만 나머지 6권은 아직 소개되지 않았다. 성 바오로 출판사의
맛없는 번역판을 제외하면... staire는 고등학교때 Penguin books에서 나온 7권을 가지고 있었다. 연이에게 그
책을 주었고 연이도 Narnian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
가을, 연이를 비롯한 의예과 학생들은 연례행사인 실내악 발표를 위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staire는 연이네 팀뿐아니라
서너팀의 연습을 도와주고 있었다. 연이는 원래 좀 어두운 표정의 차분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날따라 더 가라앉아 있었다.
연습을 마치고 staire는 여느때와 같이 연이를 바래다주기 위해 반포로 갔다.
연이의 집 앞, 어두운 골목에서 연이는 불쑥 staire에게 말했다.
"어떤 일을 그만두려니 부작용이 심하고, 계속 하기에도 문제가 많고... 이럴 땐 어떻게 해요?"
혹시 그건 민기와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선택을 하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라면 모든 일을 다 깨끗이 마무리하려고 무리해선 안되는 거야. 어떤 쪽으로든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라면 용감하게 그걸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닐까..."
비겁한 staire는 이런 정도밖에 말할 수 없었다.
staire는 누군가를 사귀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연이를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staire로서는 후배 커플을 깨는 나쁜 선배가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연이의 얼굴은 전보다 더 우수를 머금은 모습이
되었다.
이때쯤 연이의 집안 사정을 알게 되었고 연이가 어두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연이는 국문과 아니면 불문과를 지망하는 문학소녀였지만 연이의 어머니는 의대를 무척 좋아하는 분이셨다. 고등학교때, 문과,
이과를 나누는 과정에서 연이는 어머니와 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이과를 택했다. 그날 연이의 일기에는
'연이는 죽었다. 내일부터는 남의 뜻대로 살아가는 연이가 되어야 한다...' 라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학년말 시험이 다가오는 11월 어느날, 연이를 만났다. 연이는 나와 사귀고 있다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staire는 적당히 회피했지만 연이는 이미 staire보다도 훨씬 뛰어난 점장이가 되어 있었다.
"아빠는 뭔가를 피하고 있어요. 왜 그렇죠? 남들의 눈이 두려우신가요? 아빠가 가진 사랑으로 그걸 넘어설 수는 없어요?"
staire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강남 시립병원에 파견근무중이던 staire는 병원의 뒤뜰에서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보며 일기를 썼다. 혹시 일기장을 넘겨다본
사람이 있었다면 흰 가운을 입은 늠름해보이는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이라는 사실에 의아해했을 것이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의대로부터, 사랑하는 친구들과 선생님들, 부모님의 희망, 그리고 어쩌면 연이마저도... 가을을 즐기기엔 바람이 너무 차다..."
11월 24일 화요일, staire는 반포의 Telepathy에서 연이를 만났다. 반포의 cafe들은 이름이 신선하다. 특히 우리말로 번역된 부분들이 그렇다. Telepathy는 한마음, Till은 기다림...
"아빠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뿐이야. 네게 말해주고 싶어... "
"누군데요?"
"수학 선생님이신 우리 아버지께선 늘 내게 문제를 내주시곤 했지. 내겐 무척이나 어려웠지만. 네가 맞춰보겠니?"
연이는 갑자기 일어섰다. 눈물을 씻으러 가는 것이다. 그랬다. staire는 제자 하나는 제대로 키운거다. 이미 알고 있는 거다...
연이가 돌아왔다. 아직도 눈은 젖어 있었다.
"직접 말씀해주세요. 듣고 싶어요."
"그 사람은 Narnian이야..."
연이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staire는 연이의 손을 잡았다.
바보같이... 왜 우는걸까?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6시38분11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前承)
오빠가 아빠가 된다고들 한다. 유치하지만 정곡을 찌른 말이다. 그러나 아빠가 오빠가 되는 경우를 보신 적이 있는지?
staire의 16명의 딸 중에서 유일하게 연이가 그랬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연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11월 24일이 지나고 며칠 후, 연이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라기보다는 그동안의 연이의 일기를 묶은 것...
11.24.
아아,
나는 그를 계속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강신재의 소설 '젊은 느티나무' 마지막 부분)
11.26.
사랑하는 나의 STAIRE,
언제나 이렇게 써 보고 싶었읍니다.
그러나 그동안 이렇게 시작한 편지는 보내지지 못했읍니다.
(당시의 맞춤법은 -습니다... 가 아니다)
11.27.
맑고 행복한 생각만 하며 살고 싶다.
나는 왜 우울속에 가라앉을까...
11.29.
왜 이렇게 내가 세상의 윤리와 규율에 버림받은 기분일까?
12.1.
시간이 빨리 갔으면...
나는 어서 크고 싶어요.
이 겨울을 걷어 주세요...
(연이는 민기 때문에 괴로와했던 거다)
두 사람의 앞길은 밝지 못했다. 우선 민기가 있다. 민기는 무척 착하고 소심한 녀석이었고 나쁜 선배를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간혹 두사람이 만날 때 민기는 눈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민기가 연이에게 한 마지막 말은 '민형이 형이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지만 나만큼은 아닐거다...'였다는데 사실인지도 모른다. 둘째로는 연이의 너무나 어두운 성격... 전혜린씨의
글 중에 '사랑과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이란 표현이 있는데 마치 연이를 두고 한 말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의사를 너무나 좋아하는 연이네 부모님과 의대를 곧 떠나려는 staire의 엄청난
부조화. 더우기 연이에게도 아직 staire의 방향 전환에 대해 얘기하질 못했다. 언젠가 얘기해야 할 텐데 말을 꺼내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곧 학년말 고사가 다가왔다.
서울 의대 본과 3학년의 학사 일정은 특이하다. (다른 의대도 비슷할거다.) 1학기말 시험이 없고 연말에 1년치 시험을
한꺼번에 본다. 그때문에 어머니와 성적표 내놔라, 이번 학기엔 성적표가 없다, 그런게 어딨냐 빨리 내놔라 하고
옥신각신했었지만... 12월 10일경에 종강, 그때부터 학점수만큼 study day를 준다. 12월 24일에 내과시험,
30일에 산부인과, 이듬해 1월 5일에 소아과, 9일에 정신과, 13일에 일반외과, 17일에 정형외과...이런 식으로 마취과,
진단방사선과까지 끝내면 성탄이고 신정이고 다 잊은 채 1월말이 된다. (그러니까... 계산 잘하는 사람은 눈치챘겠지만 내과는
무려 12학점, 따라서 내과 시험을 망치면 성적표는 처참해진다)
행복감에 젖을 틈도 없이 staire는 바빠졌다. 이왕 그만두더라도 시험을 망쳐서 나갔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연이는
시험 본 날에나 만날 수 있었다. 어느때보다도 staire가 곁에 있었어야 할 시기에 연이는 혼자서 외로이 민기의 그림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아과 시험을 보던 날, 시험을 마친 즉시 수술장 샤워실에 들러 목욕을 하고 연이를 만났다. 면도까지 할 여유는 없었지만.
전날 받은 1월 1일자 편지의 '사랑하니까 부재도 견뎌야 하는 거지만 사랑하니까 실재가 더욱 그리워요...'라는 구절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1월의 비원은 추웠고 바람이 매서웠다. 연이가 들고 온 장미는 시들어 축 처졌다. 시험에 시달리던 staire는 연이를 감싸줄 여유를 잃었고 두사람은 다툼 끝에 어색하게 집으로 향했다. 전철을 기다리며 연이는 말했다.
"지금의 제가 마치 저 아닌 남인 것같아요."
staire는 긴장했다. 영이(기억하시는지? 연이의 문예반 선배인 staire의 세째딸)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연이가
문예반 시절에 쓴 글. '지금의 나는 과연 나일까...'로 시작하는 염세적인 글을 보고 영이는 연이가 곧 자살하지 않을까 하는
전율감을 느꼈다고 했다. 대학에 온 이후에도 연이는 수면제를 30개정도 늘 가지고 다녔다. 언제든 원하는 순간에 죽기 위해서.
staire는 전차가 역에 들어오는 순간 연이가 선로에 뛰어들까봐 연이의 어깨를 감싸안아야 했다. 연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staire의 손을 제지했다.
정신과 시험을 보던 날 연이는 오지 않았다. 늘 만나던 대학로의 '마리오네뜨'(이것도 요즘 없어졌다...) 2층에서 한없이
기다렸지만...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반외과 노트는 늘 같은 곳이 펼쳐져 있었고... 시험 전날 연이에게 전화를 했으나
연이는 '당분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staire는 외과 시험을 보지 않았다. 아니, 이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과목도 포기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험이 연이보다 중요했던 것은 아닌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더이상 시험을 보는 것은 무의미했다.
연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staire는 연이의 비올라 레슨날인 목요일에 관악을 찾았다. 그리고 음대 연습실 앞 복도에 걸린 칠판에 이렇게 휘갈겨 썼다.
"staire는 지금 xxx호에서 기다리고 있다. 오고 싶지 않으면 이거 지우고 가."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이 열렸다. 연이가 서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7시35분24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해간다. 그러나 그가 뜻하는 대로는 아니다.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루이 보나파르트의 안개달 18일'에서)
연이도 알고 있었다. staire의 결심을. 그리고 왜 staire가 그것을 쉽게 결행하지 못하는지도. 휴학계를 냈다는 말을
들은 연이의 놀라움은 컸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는 것, 예정된 것이었다는 걸 연이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연이는 staire의 결심을 듣고 이렇게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이젠 오빠가 하고싶은 걸 하실 수 있겠네요..."
staire가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휴학 사실을 알리기까지의 몇 주 동안이 연이와 보낸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부산으로 떠나기 전날 아무도 없는SNUMO 서클룸에서 staire는 의대의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헤세가 마울브론 신학교를 떠난 것은 나보다 조금 젊은 시절이었다. 내게는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다. 나 자신이 선택하고
사랑하고 책임져야 하는... 나는 아름다운 길을 택하기로 한다.... 나의 부재는 길지 않을 테지만 의대생으로서 여러분 앞에
서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내게 행운을 빌어 주기 바라오..."
서클 노트에 남긴 편지를 끝으로 staire는 의대를 떠났다.
부산은 낯설었다. 재수생(나이로 따지면 7수생)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staire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관악으로, 그리고 연이에게로. staire가 과기대나 포항공대를 염두에 두지도 않은 것은 연이 때문이다. 연이에게선 자주
편지가 왔고 staire는 지금도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오빠는 나만을 영원히 사랑하고, 곧 제곁에 오신다고 믿고 있어요. 저 역시 오빠에 대한 이 뜨겁고 맑은 사랑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나갈 거에요. 저는 죽을 때까지 오빠를 사랑할 거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란 연이의 부모님을 말하는 것일까?
staire의 편지는 뜸했고 짧았다. 처음엔 의연하던 연이의 편지도 점점 어두운 빛을 띠게 되었다.
"지금 서울은 회색빛과 갈색조의 가을입니다.
바쁘게 도서관을 나서는 발부리에 걸리는 건 회색빛 바람,
여학생들의 복고풍 머릿결을 휘날리는 흑갈색 바람,
무엇보다 우리들의 관악을 낙엽지우는 저 갈색의 바람.
기억나지 않으세요. '비어 있음'을 고백하게 하는 이 가을의 정취가...
...당신의 강력한 지배를 느낍니다. 저는 부정할 수 없읍니다. 당신은 순수한 첫사랑으로 다가왔고 저는 운명으로 받아들였음을...
1988.10.19 姸 "
학력고사 나흘 전, 서울로 돌아온 staire는 10개월만에 연이의 따뜻한 온기를 두 팔 가득 안을 수 있었다.
(아직 안 끝났어요)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8시34분53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먹고 있는 걸 보면 배고파진다. '롬'과 '줄'도 그랬을게다. 그들의 아픔은 나누어줄 줄 모르는 자들 사이에서 느끼는 허기였기에 더욱 예리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같이 있을 수 없는 것만큼 무서운 고통은 없다.
연이와 staire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신 신은 시간에 대해서만은 인색했다.
처음엔 민기가 있었고 둘이는 남남이었다. 그다음엔 학년말 시험이 있었다. 짧은 봄이 있었으나 예정된 이별 앞이었기에 몹시도
추웠다. 그다음 1년간은 서울과 부산의 거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한번 연이가 부모님께는 친구네 집에서
자겠다고 해놓고 부산을 찾은 적이 있었지만 하룻밤은 매정할 정도로 짧았다.
Juliet : Wilt thou be gone? it is not yet near day.
It was the nightingale, and not the lark,
That pierced the fearful hollow of thine ear,
Nightly she sings on yond pomegranate-tree.
Believe me, love, it was the nightingale.
Romeo : It was the lark, the herald of the morn,
No nightingale : look, love, what envious streaks
Do lace the severing clouds in yonder east.
Night's candles are burnt out, and jocund day
Stands tiptoe on the misty mountain tops.
I must be gone and live, or stay and die.
아침을 알리는 종달새 소리를 밤에 우는 나이팅게일이라고 우기는 줄리엣과 그녀를 달래며 떠나는 로미오, 아침 해를 원망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이제 겨우 함께 있게된 두사람 앞에는 새로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가 본과 1학년이 되어 정신없이 바빠졌고 연이의
부모님들께선 의대를 그만두고 공대를 택한 '정신나간' staire를 달가와하지 않으셨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에도 바쁜 연이를
부모님들이 어떻게 대했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staire에게도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이상
부모님의 돈으로 공부할 수는 없는 일. staire는 좀 무리하게 아르바이트를 했다. 거의 매일 두 명 이상을 가르쳤고 집에
돌아가면 12시가 넘는 것이 예사. 공강 시간에 빈 강의실에 혼자 앉아 리포트를 쓰거나 식당에 앉아 책을 읽어야 했다.
도서관까지 걸어갈 시간도 아까왔던 거다. staire도 연이도 지쳐 갔다...
언제부터인지 일요일에 전화를 해도 연이의 부모님들께선 바꿔주지를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났다. 의대로 달려갔다. 연이는
싸늘했다.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으나 몇 달이 가도 연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staire는 어리석게도 연이를 원망했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더니...
몇 년 후에야 알았다. 연이도 무척 마음 고생이 심했음을. 연이는 그 이후 서울대병원에서 정신 치료를 받았던거다...
staire와 연이가 다같이 4학년이던 어느 날 의대에서 연이와 마주쳤다.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staire는 연이를 붙잡으려 했으나 연이의 시선은 공허했다.
연이는 staire를 보고 있지 않았고 staire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연이는 고등학교 시절에 일기에 썼던 대로
'남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것일까? 아니면 staire를 외면하는 것이 연이의 '자신의 길'을 향한 첫발자국이었을까?
그날 저녁에 민기와 마주쳤다. 깊은 원망과 증오를 담은 민기의 눈길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민기는 나보다 연이를 더
사랑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 세사람은 이제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 철저하게 남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끝 )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23일(수) 17시14분52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7 : RAA system
(당분간 분위기를 바꿀 생각입니다. 무표정하게...)
생리학 시간, 성호경 교수님의 강의...
"그런데 왜 신장이 두 개 있느냐? 하나가 고장나도 다른 한쪽으로 살아가기 위해서죠. 상당히 합목적적이죠?"
저런... 신장이 3개면 더 좋겠네, 그럼... 의대 교수님들의 특징은 유달리 '합목적성'에 집착한다는 것. 인체가 얼마나 오묘하고 정교한가를 역설하시느라 무리를 하실 때가 있다.
그런데... 인체는 과연 '걸작'인가? 적어도 내 느낌으로는 그렇지 않다. 잘 만들어진 건 사실이지만 그건 사람이 만들었다고
가정할 때의 얘기다. 전지전능의 조물주를 상상하기엔 너무나 약점이 많은 작품인거다. 하긴 그런 약점들이야말로 조물주께서
인간의 생명을 필요한 순간에 빼앗음으로써 자신의 섭리를 나타내어 보이겠다는 의도를 나타낸다면 또 별 문제겠지만.
수많은 예가 있지만 하나만 소개한다면 RAA system (Renin-Angiotensin-Aldosterone system)을
들 수 있다. 혈압이 떨어지면 신체 각부에 필요한 혈액을 공급할 수 없게 되므로 우리의 몸은 '총체적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신장에서는 이러한변화(혈압 강하)를 감지하고 renin이라는 효소를 분비한다. 이 효소는 혈액 속의
angiotensinogen을 angiotensin I으로 바꾸며 angiotensin I은 폐 속의 peptidase에 의해
가수분해되어 angiotensin II가 된다. 이 호르몬은 혈관을 수축시켜 혈압을 높임으로써 신체 각부에 혈액이 공급될 수
있도록 해준다. (즉, 혈액의 절대량이 모자라므로 혈관을 좁힘으로써 쓸데 없이 큰 혈관 속에서 노는 혈액을 모세혈관으로
밀어내는 거다.) 게다가 angiotensin II는 부신 피질을 자극하여 aldosterone을 분비하도록 한다. 고등학교
생물 책에 나오는 부신 피질 호르몬
중에 '무기질 코르티코이드'란 게 있는데 그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aldosterone이다. 이 호르몬은 항이뇨 작용을 하여
(즉 수분의 배설을 억제하여) 신체 수분량을 늘리고 결과적으로 혈액량을 늘리는 것이다. 이리하여 떨어졌던 혈압은 정상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얘기하면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RAA system은 일견 대단히 정교한
조절기구처럼 보일 테니까... 그러나 요즘은 이system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이 많다. 그 이유는 이 시스템의 동작을
일으키는 첫 단계의 센서가 저급하기 때문이다. Macula densa라고 불리는 이 센서는 신동맥 혈압의 강하를 감지한다.
그런데 혈압 강하의 원인이 무엇인지 체크하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다...
혈압 강하의 원인이 외상 등에 의한 실혈(失血)이라면 당연히 RAA system이 가동되어야 한다. 원시인들은 이 시스템 덕을
톡톡이 보았을거다. 거친 자연속에서 사나운 적들과 맞부딪치며 살아갈 때 피를 흘릴 일이 좀 많았겠는가. 그러나 현대인들의 처지는
그렇지 않다. 성인병의 증가 추세로 인해 RAA system의 부작용을 자주 만나게 된거다.
심장이 어떤 원인으로 피를 제대로 짜내지 못하게 되면(심부전) 당연히 신동맥 혈압도 떨어진다. 그럼 macula
densa는 '출혈에 의한 혈압 강하'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RAA system이 가동된다. 가뜩이나 지쳐 있는
심장은 angiotensin에 의해 혈관이 수축되면 펌프질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뿐 아니다. Aldosterone이 일을
저지른 결과 혈액량은 늘어나고 우심방으로 들어오는 혈액의 부피도 는다.
이렇게 되면 힘이 부치는 심장은 완전히 수축하지도 못하게 된다. 이래서 심장 속에는 피가 가득 차서 심장이 부풀어오를 정도가
되지만 신체 각부는 혈액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게 되고 상황은 악화된다. 멍청한 macula densa는 물론 상황이 악화된
것을 알고 더욱 강력한 신호를 보내 더 많은 renin이 분비된다.
이런 악순환은 죽을 때까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된다... RAA system은 현대인의 진화 속도를 따르지 못한 구식 시스템인 셈이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4월18일(월) 22시23분17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8 : 안락사
온갖 것 보기 위해 태어났지만
온갖 것 보아서는 안된다 하더군...
괴테, 파우스트 2부 (린세우스)
양승용씨가 입원실에 들어선 것은 오후 2시쯤이었다.
'이야... 교과서적인 황달이군...'
staire는 감탄의 눈빛을 애써 감추며 admission note(입원하면 맨 먼저 쓰는 기본보고서) 용지를 뜯었다. 이건
원래 인턴과 주치의(레지)가 따로 한 장씩 쓰는거지만 당시 서울대 병원에선 인턴, 레지의 격무를 덜어주는 의미에서 학생이 2부를
작성하는 게 공공연한 관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CC = chief complaint)
전에 다른 큰 병을 앓으신 적은? (hx = history)
현재 증세가 어떠신데요? (PI = present illness)
가족 중에 특별한 질환을 가지신 분은? ( FHx = family history)
그다음엔 좀 지루한 질문의 연속. (SR = systemic review) 머리가 아프지 않으세요? 숨이 가쁘시거나.... 소화는 잘 되시고...
여기까지가 대충 30여분, 그다음은 직접 손으로 하는 기본 검사들 (PE = physical exam.)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샅샅이 뒤진다. 우선 VS (vital sign), 즉 체온, 호흡수, 맥박수, 혈압 측정. 그다음엔 청진, 복부 촉진, 무릎
반사...
이런 걸 다 하면 1시간 남짓 걸린다. 이렇게 꼼꼼하게 하면 그건 실습생이라는 뜻이다. 인턴이나 레지라면 10분, 20분에 끝난다.
'skin : melon color'를 적어넣으며 staire는 환자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세상에... 책에서나 보던 녹색인간을 이렇게 코앞에서 보게 되다니... 황달이 갈데까지 갔군...
"강선생, 어때? 양승용씨?"
주치의가 물었다.
"글쎄요. 황달이 심하지만 뭐 건강해보이는데요. 씩씩하게 말씀도 잘하시고, 표정도 밝고, 식사도 잘 하시고..."
"그렇게 봤어? 그환자, 오늘을 넘기기 어려워..."
"그래요?"
"간성 혼수(hepatic coma)에 여러 번 빠진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요즘 불안정해서 입원시킨 거야. 차트 읽어보라구..."
과연 그랬다. 양승용씨의 차트는 웬만한 책만큼이나 두꺼웠고 각종 검사치는 이런 몸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버티어왔을까 싶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런데도 저렇게 정정해보이는 건 왜일까? 그것도 좋게 말하면 인체의 신비라고 해야 하나?
오후 5시를 넘기지 못해 양승용씨는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이런, 오늘 집에는 다 갔군 하는 예감... 혈압이 떨어지고 심전도는
규칙성이 전혀 없고... 주치의는 심폐소생술(CPR =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을 준비시키고
병동은 활기(?)를 띤다. 간호사와 간호 보조원 4명이 병실 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CPR이 시작되었다. 주치의는 강심제
주사기를 든 채 심전도를 주시하고, 간호사는 에어 백으로 인공호흡을 시키고...
인턴이 staire를 불렀다.
"지금부터 심장 마사지(cardiac massage)를 하는 거야. 요령은 알지?"
staire는 환자의 가슴뼈 바로 위, 그러니까 명치 조금 위에 두 손바닥을 겹쳐 대고 힘껏 가슴을 누른다.
"힘이 그것밖에 없어? 왜 자네를 시키는지 모르나? 힘껏 눌러, 힘껏.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staire는 체중을 실어 정말 부러지도록 눌렀다. 순간, 뭐가 부러져 나가는 느낌.
"정말 갈비뼈가 부러진 것같은데요?"
"지금 갈비뼈가 문제야? 더 힘껏 해..."
거의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마사지를 한 보람이 있었는지 양승용씨는 숨을 돌렸다.
모두들 땀에 흠뻑 젖었다.
"잘했어. 그렇게 하는 거야."
땀을 닦으며 병실을 나서는데 복도에는 벌써 환자 가족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환자를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거다.
'아니, 어떻게 살려 놓았는데...'
그러나 주치의의 설명은 냉정하다. 이미 틀렸다는 것, CPR은 다만 객사를 면하고 집에서 임종을 맞기 위한 미봉책이라는 거다.
가슴이 으스러진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증세가 그런지는 모르지만 양승용씨는 심하게 헐떡이고 있었다. 치사량의 거의 3분의 1은
되어보이는 모르핀을 맞고 진정은 되었으나 아직도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아니, 병원 입원실에서 죽는 건 객사라고? 그럼 환자를 저 꼴로 만들어놓고 집에 싣고 가는 게 환자에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다는거야?
왜 편히 죽도록 놔두지 못하는거야...
그러나 병원 현관에는 이미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주치의와 staire, 간호사 3사람은 환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양승용씨와 함께 현관으로 내려갔다. 환자를 태우고 나자 주치의가 staire를 손짓으로 불렀다.
"원래는 내가 따라 내려가서 사망진단서를 써야 하는데, 오늘 밤에 한 건 더 있을 것같아서 병원을 비울 수가 없어. 자네가 가라구. 사인은 이미 써 두었으니까, 언제 죽든 개의치 말고 집에 도착한 즉시 죽은 것으로 해두면 돼."
어리둥절하여 받아든 진단서에는 'cardiac arrest'라는 사인이 이미 적혀 있었다.
"알았습니다. 어디까지 가면 되는데요?"
"집이 조치원이래."
"?????"
이래서 staire는 조치원까지 가게 된거다. 이미 날은 어둑어둑했다. 조치원이 얼마나 먼 지 모르지만 내일 아침 수업까지 망친 건 확실했다.
앰뷸런스에는 기사 이외에 staire와 환자의 딸이 탔다. staire와 비슷한 연배였다.
"이런 일을 처음 겪으시는 거죠?"
양승용씨의 딸은 의외로 차분했다. staire가 실습생인 걸 알고 있다...
"전 처음부터 입원에 반대했어요. 다 부질없는 일을... 그냥 편안히 돌아가시게 하고 싶었어요."
그 말을 알아들었을 리 없지만 양승용씨의 용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staire는 emergency kit를 열었다. 사실
그걸로 뭘 해야 할 지 몰랐다. 낯익은 진통제와 강심제 이름들... propranolol, atropine...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무서운 고통과 싸우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잔인한 짓을 해야 하는 건지...
양승용씨의 딸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엉뚱하게도 눈빛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양승용씨의 딸은 날렵하게 emergency kit를 낚아챘다. 그리고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스트리키닌...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는 눈을 staire는 애써 외면했다. 스트리키닌이 왜 거기 있는지 잠시 어리둥절하는 사이 그녀는 거의 한 병을
주사기에 담더니 양승용씨의 팔에 꽂혀 있는 비닐 튜브를 찔렀다...
"전 간호 전문대를 다녔어요. 지금 조치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구요. 진단서 이리 주세요. 사인해드릴테니..."
익숙한 솜씨로 사인을 하고 진단서를 staire에게 돌려주며,
"죄의식 갖지 마세요. 강선생님이 반대 안하실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좋은 의사가 되세요. 하지만 환자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아요..."
"......"
"여기서 내리시면 서울 가는 버스가 있어요. 집에 도착해서 돌아가신 걸로 해두지요. 어차피 부검은 없을 테니까요..."
아버지의 눈을 감겨드리며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처연한 미소를....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4월20일(수) 00시58분52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9 : 해부 실습
나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전체를 통해 영웅이 한쪽 팔이나 한쪽 다리를 잃은 예를 발견한 적이 없다. 신화는 괴물들에게만 불구의 형벌을 뒤집어씌웠던 것이다.
- E. 윙거. '유리창의 꿀벌들'
사람의 몸은 아름다운 거라고 쉽게들 말하지만 그건 '건강한' 사람의 경우에나 그렇다. 시체들(cadaver)의 몸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시체와의 첫 대면, 창밖은 화창했지만 해부실에는 요사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한 방에 4개씩의 테이블이 있고 테이블 위에는
파란 천으로 덮인 시체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윤경이는 그 광경에 벌써 질린 듯 울면서 뛰쳐나가고....
장갑을 꼈지만 주저하면서 천을 걷었다. 시체는 두꺼운 비닐에 싸여 아직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습기가 마르는 것을 막기
위한 비닐을 벗기자 드디어 우리 조(10명)와 한 학기를 보낼 시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비쩍 마른 남자. 피부는 다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고 눈을 채 못다 감은, 입도 약간 헤벌어진 처참한표정.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리를 덮쳐온 것은 코를 찌르는
포르말린 냄새였다.
최루탄을 연상시키는... 사후 강직으로 인해 약간 뒤틀린 자세.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30대? 아니면 40대? 머리가 검고 주름살이 적어 그보다 더 나이 든 시체는 아닌 게 분명했다.
첫날은 면도칼로 온몸의 털이란 털을 모조리 깎는다. 그러나 포르말린에 얼마나 담가 두었는지 피부가 불어 같이 슬슬 벗겨졌다.
까치집처럼 뒤엉킨 머리와 그밖의 모든 체모를 밀어내자 이제 제법 해부학 그림책(atlas)에서 보는 시체다운 모습이 되었다.
4구중 하나는 여자 시체인데 털을 깎고 나면 언뜻 보아서는 남녀 구별이 안되는 할머니였다.
아직 본격적인 해부는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실습을 끝내고 나서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저녁식사 시간인데도...
다음날부터 해부는 시작되었다. 피부를 벗기고 정맥을 발라 내는 일부터...
그림책의 그림들이 얼마나 idealize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도대체 각종 섬유들이 너덜너덜하게 얽혀 도저히 그림책처럼
깨끗이 발라낼 수가 없었다. 옆방에는 젊은 여자의 시체가 있었는데 제법 하얀 피부와 머리를 깎고서도 여전히 예쁜 얼굴 때문에
애들이 차마 칼을 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찾아온 조교가 그 시체의 코를 잘라버린 후에야 칼질을 할 수
있었다...
해부를 마치고 나면 저녁 시간이다. 그러나 몸에 짙게 배어버린 포르말린 냄새와 그 사이를 비집고 스며나오는 시체 특유의 퀴퀴한 냄새 때문에 식욕이 나질 않았다.
의대 도서관은 본과 1학년들이 뿜어내는 시체 냄새로 인해 특유의 묘한 분위기를 띤다.
해부학은 본과 1학년 1학기동안 개설된다. 전체 강의는 3부분(팔다리, 머리와 목, 몸통)으로 구분되어 3번 시험을 본다. 그리고 매번의 시험에는 실습 시험(땡시험)이 있다. 땡시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어쨌든 첫 해부는 다리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다리 부분을 샅샅이 찢어내고 나면 슬슬 해부에 익숙해진다. 칼질 솜씨도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윤경이도 애들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열심히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리고 당겨본다. 게다가 이때쯤이면 이미 맨손으로
해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엔 장갑을 끼고서도 거북하던 것이 이제는 맨손의 섬세한 감각을 위해 거의 아무도 장갑을 쓰지
않는 거다. 그리고 몸에 밴 시체 냄새에도 이미 무감각해진 지 오래. 저녁에 식욕이 없다는 것도 옛날얘기다.
실습 시험 전날이면 실습실은 장터처럼 수선스럽다. 시체는 개인차가 워낙 심해 다른 조 시체를 보지 않고서는 실습 시험을 볼 수
없는 거다. 다들 여기저기 몰려 다니며 너덜너덜해진 혈관과 신경, 근육 이름들을 외느라고 바쁘다. 우리가 해부한 시체의
토막토막이 실습 시험 문제로 출제되니까...
대부분의 학생들이 돌아가고 나서 staire와 영걸이, 석재, 성현이가 끝까지 실습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시간은 새벽 1시쯤. 갑자기 영걸이가 말했다.
"너, 이런 생각 해봤니? 이 건물에는 지금 시체들이 우리보다 더 많다는 거..."
갑자기 으스스한 생각이 들어 시험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집으로 향하고 말았다.
두번째 부분인 머리와 목을 해부하기 위해 팔다리를 떼어내면 시체는 갑자기 왜소해진다. 어깨가 없어진 사람의 몸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우선 뇌를 꺼내야 한다. 뇌는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다음 학기의 신경해부학 교재로 쓰이는 것이다. 시체의 머리에 빙 둘러 금을
긋고 실톱으로 두개골을 톱질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둑어둑해지더니 급기야
마른 천둥이 치는 거다. 애들은 기겁을 해서 톱을 내려놓고 매점으로 향했다.
'좀 있다가 해야지...'
날씨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말짱해지면 다시 실습실에 모여 톱질을 하고, 그러다 보면 또 천둥 번개가 치고. 이상하게도 끝내
비는 오지 않고... 해부하다가 입에 한 조각 튀어 들어가도 뱉으면 그만인 경지에 이르렀지만 역시 찜찜하다.
머리뼈의 덮개(calvaria)를 떼어내면 뇌막을 가위질해서 열고 손으로 뇌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당기며 12쌍의
뇌신경 뿌리를 끊어낸다. 그리고 나서 목 뒤의 1-2번 내지 2-3번 척추뼈 사이에 칼을 꽂아 연수를 자르면 뇌는 깨끗이
분리된다. 날씨 탓인지 누가 칼을 꽂느냐 하는 문제로 또 한참 실랑이가 있었다.
이제는 머리를 좌우로 두쪽낼 차례다. 그림책의 머리 단면을 보며 뼈가 있는 부분은 톱질을 하고 그렇지 않은 곳은 가위로 자른다.
마지막으로 입속에 가위를 넣어 혀를 좌우로 잘라주면 머리는 좌우로 갈라진다. 그러나 몸통에 여전히 붙어 있어 묘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마치 머리가 둘인 것처럼 보인다...
눈을 해부할 때면 괜히 제 눈에 뭐가 들어간 것처럼 찝찝하다. 그건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지만 눈처럼 예민한 곳인 경우는 더 심하다. 정관을 자를 때 괜히 움찔하는 남학생이 한둘이 아니다.
머리부분 실습 시험 전날 시체의 머리 하나가 없어져 화제가 되었다. 시체와 적출물처리에 관한 규정에 엄격히 금지된 일이지만
누군가 집에서 공부하려고 가져간것이다. 그러나 의대생들은 태연하다. '그까짓 머리 반쪽...' 하지만 그녀석이 밤에공부할 때
어머니께서 밤참이라도 준비해 불쑥 녀석의 방을 찾았다면...
몸통 해부를 마칠 때쯤이면 시체는 거의 빈껍데기다. 조각조각 뜯어내고 가뿐해진 시체를 보면 사람의 몸이 복잡하긴 해도 참 별 것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시체는 위가 주먹만하게 수축해 있었다. 얼마나 굶으면 저렇게 될까? 그리고 폐에는 마치 삶은
감자가 굳은 듯한 색과 질감을 가진 알 수 없는 덩어리 몇 개가 있었다.
조교가 폐결핵의 흔적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엉덩이에는 깊은 종기가 나 있었다.
환자가 몸을 뒤채지 못해 한 자세로만 누워 있다보면 바닥에 닿은 부분은 혈류가 나빠져 그렇게 썩어 버리는 것이다. 거의 뼈에
닿을 듯한 깊은 욕창(종기)을 보며 말년에 간병해 줄 사람도 없이 외로이 죽어간 폐병 환자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환자는 가끔 돌아 눕혀야 해...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시체를 쌌던 비닐과 테이블이며 바닥 여기저기에 널린 너절한 조각들만 남기고... 그 부스러기들을 모아서
화장하는 거겠지. 죽어서까지도 편히 잠들지 못했던 분들이 이제나마 편안히 눈을 감으실까... 하긴 그 '눈'은 이미 조각조각
나버린 지 오래지만.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4월20일(수) 02시18분49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0 : 땡시험
땡시험은 해부학 시험의 꽃이다. 배점도 크지만 밤새도록 실습에 열중한 학생과 대충 놀고 지내며 남들이 해부해 놓은 것 구경만 한 녀석들의 차이가 확연하다.
우선 편한 복장으로 등교해야 한다. 구두는 금물. 조깅한다고 생각하고 길이 잘 든 운동화를 신는다. 시험 직전에 학생들이 한 방에 모이면 번호순으로 한 명씩 들어가며 시험이 시작된다.
시험장에는 시체에서 잘라낸 토막들이 배열되어 있고 하나하나 번호가 붙어 있다.
시간은 30초. 30초 이내에 시체 토막에서 표시된 부분(실로 묶거나 특별한 색이 칠해져 있거나...)의 이름을 써야 하는데
그 이름이 만만찮게 길기 때문에 보는 즉시 생각나지 않으면 망하기 십상이다. 'right recurrent laryngeal
nerve'같은 이름을 2-3초 이내로 쓰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30초가 지나면 종을 친다.
'땡' 소리와 함께 2번 문제로 옮겨 가면 두번째 학생이 들어온다. 또 30초가 지나면 종소리와 함께 세번째 학생이.... 이런
식으로 40문제 정도를 풀고 나면 시험이 끝난다. 마지막 문제를 풀고 나면 손을 씻고 (이때쯤이면 이미 장갑을 끼는 학생은
드물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애들이 기다리는 술집으로 향하는 거다. 이때 누구나 한번쯤 뒤를 돌아보며 시험에 열중하느라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다.
"시험이 아니라 괴기전이군..."
한번은 땡시험 문제가 유리 접시에 담겨 있고 옆에 커다란 돋보기가 놓여 있었다. 돋보기로 열심히 들여다본 문제는
malleus(귀속의 작은 뼈 3개중 하나인 '망치뼈'). 좌우에 하나씩 있는 것이 문제로 나왔을 때는 right, left를
명시하지 않으면 감점 당하는데 이건 간신히 망치뼈라는 걸 알아볼 뿐 좌우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한참 고민하던 staire는
'땡' 소리에 놀라 그냥 malleus라고 쓰고 가벼운 푸트워크로 다음 문제를 향해 뛰었다.
어느 문제는 그냥 시체의 머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도대체 어디의 이름을 쓰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머리(왼쪽 절반)'이라 쓸 순 없고...
한참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다 마침내 귀에 작은 플라스틱 조각(빨간색)이 붙어 있는걸 발견했다. 답은 'antitragus of
left auricle'. (귀를 겉에서 볼 때 해부학적이름이 붙어 있는 부분이 몇 군데인지 궁금하신 분을 위해...
helix, antihelix, tragus, antitragus, concha, lobule, triangular fossa,
scaphoid fossa, tubercle of auricle, external auditory meatus...등이 있어요.)
1번 문제는 쉽게 내는 게 관례다. 앞 학생이 뛰어들어가면 그다음 학생은 입구에서 미리 1번 문제를 기웃거릴 수 있기 때문에
쉬운 문제를 내어 누구나 맞힐 수 있게 하는 거겠지. 그런데 몸통 부분 시험을 볼 때의 1번 문제는 두고두고 화제거리가
되었다.
staire가 앞의 학생 어깨너머로 슬쩍 기웃거렸는데... 이녀석이 문제를 보더니 씨익웃는다. 흠. 쉽다 이거지? '문제'는 시체의 가슴 부분을 통째로 올려 놓았다.
그런데 이거 이상하다... 녀석이 시체의 가슴을 마구 더듬기 시작하는데 이미 미소는 사라지고 황당한 표정이다. 30초가 다 되어 '땡' 소리와 함께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라고 답안지에 끄적거린다. 거참, 도대체 문제가 뭘까?
staire는 문제를 읽어보고는 녀석처럼 씨익 웃었다. 시체의 가슴 아래에 있는 쪽지에는 '몇번째 갈비뼈인가?'라고 씌어 있다.
뭐야, 간단하잖아... 어디보자, 하나, 둘, 셋, 네엣... 다, 다섯, 아니, 여섯? 음... 다시... 이거 장난이
아니군. 이렇게 혼란스러울 수가... 골격 표본(dry bone)을 볼 때엔 혼동할 이유가 없었는데... 살이 다 붙은
통갈비짝을 놓고 세려니... 중간쯤의 붉은 실이 감긴 뼈에 이르기도 전에 갯수를 놓치고 만다. 시간은 흐르고 초조해지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땡!"
staire는 멋적은 얼굴로 '7'이라 쓰고 다음 문제로 향했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4월23일(토) 22시50분29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1 : 의대 여학생들의 결혼
1. 들어가는 말
여기에 소개하는 내용들은 짐작하시겠지만 흔한 일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의대 여학생 또는 여자 졸업생들은 평범한 결혼 생활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의사로서 완성되기까지 투자된 시간과 교육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여학생들의 젊음...
이런 것들을 가볍게 여길 수 없음에도 결코 적다 할 수 없는 여학생들이 결혼을 위해 의사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온
사회가 같이 가슴아파해야 할 현상인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의대만큼 심각한지는 모르겠지만 공대 여학생들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해결책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합니다만...
그럼 결혼 후에도 전공을 포기하지 않았던 세 여의사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할까요...
2.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
지금도 제 앨범에는 진석이 누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누나의 졸업식 사진입니다. 누나는 저보다 3년 위, 그러니까
예과 80학번이지요. 사진을 보며 늘 느끼는 것은 팔짱을 끼고 한껏 다정한 포즈를 잡았음에도 역시 연인 사이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 세련되고 지적인 멋이 넘치는 누나의 모습과 선머슴애같은 staire는 (당시 본 1을 마친 상태) 역시
'누나와 동생'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의대에서 진석이 누나는 인기 만점이었습니다.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미모와 우수한 성적, 밝고 사교적인 성격... 모든
면에서 의대 남자들을 혹하게 할 만한 분이었지요. 누나를 짝사랑하던 후배들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누나의 졸업이 다가올 즈음
의대생들은 누나의 부군이 될 행운아는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늘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나 누나가 인턴을 마치고 병리학과 레지던트가
된 후에도 누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누나께선 정릉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계시다고
하더군요. 아버님께서는 외국에 나가 계신 것인지 안 계신 것인지... 누나께선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니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요.
제가 공대생이 되던 해에 대학로에서 오랜만에 누나와 마주쳤습니다.
"민형이 너, 공대 갔대며?"
"예, 누나는 어떻게 지내세요?"
"난 결혼했어. 한 번 놀러와."
"그럴께요. 어딘데요?"
"혜화동 로터리에 '마술 가게' 알지? 거기야."
"예? 그럼 누나는 카페 주인이세요?"
"내가 아니라 네 자형께서 주인이시다. 꼭 한 번 들러서 매상 좀 올려줘."
전 어리둥절할 수밖에요. 누나께서 카페 주인과 결혼했다니...
의대 동기 인호를 만나서 그간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누나께선 가수 김승덕씨와 결혼하신 거였습니다.
"이 결혼은 말도 안 돼.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
인호는 아주 비관적으로 생각하더군요. 누나께선 해부병리학 레지던트 과정을 밟으시는 중이며 김승덕씨는 가수, 작곡, 작사가로서
활동하는 한편 카페를 경영하고... 저로서도 어떻게 그런 결혼이 이루어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연이와 함께 마술 가게를 찾은 것은 그 다음주였습니다. 누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서빙을 하고 계셨습니다. 누나께선 연이를 퍽 귀여워하셨고 우리는 그날 저녁 따뜻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중간에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누나께선 우리 테이블로 오셨습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알아. 하지만 별 대단한 사연은 없어. 작년에 내가 외로움을 좀 탔었거든. 그래서 여기 와서 자주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다가 카페 주인을 알게 된거지 뭐."
"하지만 누나, 그저 외롭기 때문에... 윽!"
누나는 땅콩 한 알을 튀겨 제 이마를 아프게 때리시고는 눈을 찡긋하며 다시 카운터로 가셨습니다.
잠시 후 부군이신 김승덕씨께서 카페 가운데로 나오셨습니다 거기엔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엔 귀한 손님 두 분이 와 계십니다. 저희들처럼 어렵게 결혼하려는 두사람을 위해 저희 부부가 같이 준비한 노래입니다..."
연이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고 손님들은 그 '귀한 손님'이 누구일까 하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렸습니다.
"흘러가는 하얀 구름 벗을 삼아서..."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남편과 함께 '내 사랑 그대 곁으로'를 부르시는 누나의 모습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3. 백마를 타고 온 왕자님
경이 누나(가명)는 무척 자상하신 분이었습니다. staire의 1년 선배였죠. 아버님께선 한국 내과 학회의 실력자였으니 대단한 배경을 가지셨으면서도 누나께선 늘 우리를 편하게 대해주셨습니다.
누나께서 본과 2학년 때 (그러니까 staire는 본 1) 갑자기 결혼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여름 방학 전까지만 해도 사귀는 사람 하나 없으시던 누나께서 2학기 개강을 하자마자 결혼이라니...
의대의 참새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얻은 결론은 '백마를 타고 온 왕자'였습니다. 여름 방학때 갑자기 혼담이 들어왔다더군요.
남편 되실 분은 미국에서 대학 학부를 마치시고 의대를 다니고 계신 본과 1학년생이었습니다. 나이로는 누나의 1년 연상이시고...
그렇지만 그 이상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나께서도 별로 아는 게 없으시다는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서로를 모르고도 결혼이 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애써 떨치고 누나의 결혼식장을 찾았습니다. 신부 대기실에서 뵌 누나는 아직 결혼하기엔 너무나 애띤모습이었습니다.
"누나. 지금 수업 빼먹고 오신 거죠?"
"민형이 너두 마찬가지잖아. 수업 빼먹은 건..."
경이 누나는 역시 신부 화장과 웨딩 드레스보다는 후배와 농담을 주고받는게 어울리시더군요.
식장은 의대 교수님들과 갖가지 의학 학회에서 보내온 꽃으로 가득 차 있어 이것이 예사로운 결혼식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신혼여행때문에 학교를 며칠 더 결석하신 후에 누나는 언제 그랬느냐는 얼굴로 학교로 돌아오셨습니다. 남편은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는
소식... 주말 부부가 아니라 '방학 부부'가 된 셈이죠. 그럼 약혼 정도로 충분할 텐데 왜 서둘러 결혼하신 걸까?
staire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1년 남짓 지난 후 우리는 다시 너무나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경이 누나와 결혼한 그 사람은 알고보니 사기꾼이었다는
거죠. 의대생은 커녕 학부조차 다녔는지 의심스러운 건달이었습니다. 우리를 더욱 분개하도록 한 것은 방학때면 경이 누나를 찾아와서
돈을 뜯고 마구 때린다는... 소설에서나 나옴직한 일들이 경이 누나에게일어났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경이 누나는 이혼을
하셨고 지금은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겪으신 커다란 시련에서 벗어나신 것인지 저로서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 사건 이후 누나는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거든요...
4. 사랑이 꽃피는 나무
staire의 동기인 정연이는 과커플인 성주와 결혼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고 둘이는 함께 인턴 생활을 시작했지요. 부부
인턴... 뭐 그리 드문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자애들 중에서도 꽤 조그만 편인 정연이가 주부 인턴이라니...
그러나 우리가 걱정한 것은 단순히 정연이가 허약하다... 는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정연이는 약한 아이는 아니었고 인턴 일이 힘들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개의 경우 누구나 그럭저럭 해낼 수 있는 것이니까요.
문제는 성주네 집안이 손이 귀하다는 것이었지요. 성주는 서울대 화학과 최규원 교수님(지금은 정년퇴임하신 명예교수님이시지만)께서
상당히 늦게 보신 외아들인지라 인턴 과정 중에 무리하게 임신을 했던 것입니다.
staire가 공대생이 되어 이들의 소식을 잊고 지내던 어느날, 우연히 TV에서 '사랑이 꽃피는 나무' 재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 방송된 내용은 인턴부부였던 여주인공(이름은 잊었습니다만)이 수술 도중에 쓰러져 유산을 하는 이야기.
staire는 긴장했습니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의 제작을 위해 서울 의대와 다른 몇몇 의대에 다니는 의대생들이 소재를 제공하는 리포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알고 있었거든요...
전화 한 통화로 간단히 모든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 내용이 방송되기 몇 주 전에 정연이가 격무에 쓰러져 유산을 했다는 우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정연이는 회복되었고 인턴을 마친 뒤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아들이어서 다행이지, 딸이었으면
계속 낳을지 어쩔지 고민할 뻔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에게 '대를 잇는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며칠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습니다.
'의대'란 아직도 여학생들에게는 척박한 곳입니다. 여의사 지망생들은 언제쯤에나 이런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까요?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4월30일(토) 02시18분14초 KST
제 목(Title): 의대 시리즈 12 : 선배의 눈물
시각, 가장 애닯은 감각...
볼 수 있으나 만질 수 없는 모든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 지이드 '지상의 양식'
그렇다. 볼 수 없다면 모를까,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중앙대 의대 내과학 교수... 누구라도 부러워하는 자리에 계시면서도 유병철 선배님은 늘 학생 시절을 그리워하셨다. staire와
나이 차가 10년 이상이면서도 늘 '병철이형'이라고 불러드리는 걸 좋아하셨고 우리와 함께 연주하는 걸 즐기셨다.
중앙대 의대에는 staire의 SNUMO(SNU Medical Orchestra) 선배 두 분이 계시다. 소아과 교수
응상이형(최응상 선배님)과 내과 교수 병철이형. 두 분 모두 졸업 후에도 악기를 놓지 않으시고 Doctors' Ensemble
단원으로 연주를 하셨다.
병철이형께선 원래 바이올린을 하셨으나 의대 졸업 후에 비올라가 더 맘에 든다며 악기를 바꾸셨다. 형의 두툼하고 깊은 소리를
듣고 있으면 형께서 연주하시는 브람스의 비올라 소나타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듣게 되기를 바라는...
연습 막간에 잠시 들려주신 'Vocalise'도 잊혀지지 않는다.
의대 오케스트라에는 묘한 전통이 있다. 연주회 전날 마지막 연습을 마치면 반장이 마지막 전달 사항을 얘기한 후 꼭 덧붙인다.
"오늘밤에는 after가 없습니다. 일찍 들어가서 푹 쉬세요..."
그러나 그날 밤 대학로의 소주집에서는 최후의 만찬(?)이 벌어지고... 제정신으로 귀가하는 사람이 드물다. 매년 반복되는
거짓말... 한 달동안 마실 술을 그날 다 마시는거다. (이번 봄연주회 전날은 하필 만우절이라 더 혼란스러웠다. 반장은
'이번에는 정말이다. 제발 일찍 자라...'고 했지만 결국 대학로의 골목집에서 다들 만났다.)
그런데 staire가 본과 3학년이던 87년의 연주회는 바로 본과 3학년들의 시험날이었다.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 은 시험
전날인 거다. 그래서 staire를 포함한 본3들은 슬쩍 달아나 시험공부할 작정들을 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선배는 한
수위... 병철이형을 비롯한 선배들께서 미리 짐작을 하시고 달아나려던 본3(악장, 반장 등 책임자들이 모두 본3이다)들을 모조리
체포(?)하신 거다.
"한심한 녀석들... 네놈들 같은 녀석들이 갈 데가 있지..."
우리는 벌써 뻐근히 취한 몸을 간신히 가누며 선배님들의 차에 나누어 타고 강남으로 압송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잠원동
포장마차촌으로 우리를 데려가신 거다. (그땐 음주운전 단속도, 심야영업 제한도 없었다.) 병철이형은 차선을 무시하고 취중운전으로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셨고 (그게 다 니들 술 깨게 하려고 그런 거야... 하고 말씀하시지만...) 금호 터널을 지날 때는
"야, 큰일났다... 터널이 두 개로 보여..."
"그 터널은 원래 두개에요..."
"거짓말 하지 마. 나 아직 안취했어.. 두 개 사이로 가면 되는 거 아냐..."
정말 두 터널 사이로 돌진하시다가 하마터면 추모음악회를 만들 뻔 하시기도...
드디어 잠원동에 도착한 우리는 간판을 보고 쓰러질 뻔했다. 심장이 약한 종호는 잠시 거품을 물었다. 무슨 술집 이름들이 하나같이 '이판사판', '산수갑산', '싹쓸이'...
92년의 연주회 때는 병철이형과 응상이형께서 Mozart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Synfonia Concertante'를 연주하셨고 광주 시향 지휘자이신 금노상 선생님께서 지휘를 맡으셨다. (금난새씨의 동생)
연주를 일주일 남짓 앞둔 어느날, 2차, 3차 after도 끝내고 남은 골수 술고래들 금노상 선생, 병철이형, staire,
당시 예과 2학년이던 석한이...)은 '요즘 학생들이 잘 가는 술집이 어디냐'는 형의 말씀에 따라 대학로의 골목집에서 곱창
전골에 소주를 마셨다. 금노상 선생, 아니 노상이 오빠(나이로는 병철이형보다 젊으시다)께서는 술이 약하기로 소문난 평소의
모습답지 않게 소주를 끝없이 따르셨고...
문득 어깨에 병철이형의 무겁지만 따스한 손길을 느낀 staire는 서둘러 잔을 비우고 형에게 잔을 드렸다.
"의대를 과감하게 떠난 네가 얼마나 부러운지 너는 모르지?"
노상이 오빠께서도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5년 전에 의대생으로서 뵌 이후로 뜸하나마 노상이 오빠의 술상무가 되어
드렸던 staire가 공대생이 되어 다시 술잔을 나누게 되다니... 금노상 선생으로서도 감회가 새로우신 거다.
그렇지만 당시 대학원 입시를 불과 두어 달 앞둔 공대 4학년의 staire로서는 형의부러움이 실감나지 않았다.
"의대 교수, 이건 못할 짓이야..."
취하셔서 음절이 불분명한 목소리로 병철이형이 말씀하셨다.
"임상 의사는 일에 몰두하면 되지. 하지만 교수는... 젊은 학생들, 얼마든지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너희들을 매일 보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학생들이 알까?"
"......"
"나도 한 때 너처럼 바꾸어볼 생각을 했지..."
"하지만 형은 다 이겨내셨잖아요..."
"그땐 이겨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인턴을 마치고 레지를 거쳐 군의관을 지나는 그 기간동안 늘 내겐 하기 싫은 일과 싸워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어. 교수직을 따내는 순간 싸움은 끝났다고 믿었지만..."
금노상 선생께서 다시 한 잔을 권했다.
"금선생,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오. 자신의 길에 일말의 회의도 없었다는 얘길 많이 들었지... 하지만 난 아니오. 바이올린을 비올라로 바꾼 것을 제외하면 난 언제나 하고 싶지 않은 걸 해야만 했어..."
형은 잔을 다시 staire에게 건네셨다.
"너도 내일 아침부터 쫓기는 생활을 시작하겠지만 나도 그래. 내일 아침에 봐야 할 환자가 몇 명인지 생각도 안나는군..."
형은 고개를 푹 숙이셨다. 석한이가 형을 부축하려는 순간 손을 내저으시며 하시던 잊지 못할 한마디...
"환자 보기 싫어..."
굵은 눈물이 형의 뺨위로 흘러내렸다. 40대의 당당한 교수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환자 보기 싫어...' 숙제
하기 싫어서,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싫어서 징징대는 철부지마냥 '환자 보기 싫어...' 그래, 그럼 오늘은 쉬어라... 하고
응석을 받아줄 누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공허하고 절망적인 '환자 보기 싫어...'
모든 것을 자신의 어깨로 떠받고 살아야 하며 가정에선 든든한 아버지로, 학교에선 존경받는 교수님으로, 병원에선 늠름한 의사로 늘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중년 남자의, 누구 앞에서도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환자 보기 싫어...'
형께서 건강 문제로 휴직하셨다는 소식을 작년에 들었다. staire는 그것이 정말 건강 문제이기를 바랄 뿐이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5월04일(수) 21시30분02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3 : 분만실에서
... 갓난아기의 빨간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아기의 이름을 June이라고 짓자...
- 존 업다이크 '달려라 토끼'
1. 웬 파스를?
산모는 평범했다. 초산으로선 좀 많은 나이(32세)였지만 요즘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다만 왠지 불안에 사로잡힌 얼굴... 불안해하지 않을 산모가 어디있을까마는...
대개 겁많은 산모라면 의료진에게 매달린다. 의사가 해결해줄 수 없는 것까지 호소하며 괴롭힌다. 의사로선 심리적으로 산모를 안정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인지라 또한 이런 응석(?)을 안받아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영미(가명)씨의 경우는 특이했다. 의료진에게 뭔가를 숨기고 싶은 듯한 눈치다. 초산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출산의 고통에 대한 공포와 불안보다는 오히려 의사나 간호사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staire가 이영미씨를 처음 본 것은 예정일이 이미 일주일쯤 지난 상태. 그러나 진통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진통 간격이 점점 밭아지는 것으로 보아 그날 밤을 넘기기 전에 낳게 될 것같았다.
이제 자궁경부가 열렸는지 확인할 시간이 되었다. 손가락으로 자궁경부를 훑어 벌어진 정도를 시간에 따라 기록해야 하는 거다.
산과의 환자복은 다른 병동과 달리 가운형이다. (다른 과에서는 남녀 구별없이 바지) 그런데 이영미씨는 그 가운자락을 단단히 감고
있었다. 가운을 벗기려고 (벗긴다기보다는 걷어올리는....) 손을 댔을 때 약간의 저항이 있었다. 수줍음 때문이 아니다.
이영미씨의 얼굴을 보는 순간 느꼈다. 이건 부끄러움이 아니야. 두려워하는 얼굴이야...
허벅지 안쪽 깊은 곳에 웬 커다란 파스가 한 장 붙어 있었다.
"이 파스는 뭡니까?"
"어릴 적에 ..화상을 입어서 흉이 졌거든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뭔가 걸리는 점이 있다. 이영미씨의 두려움은 저 파스와 무관하지 않을 거야...
김승욱 교수님께서는 화를 내지 않으신다.
"... 그래서, 강군은 그 파스를 어떻게 했나?"
"뭐... 그냥 놔뒀죠..."
"그건 곤란한데... 산도를 오염시킬 만한 부착물은 미리 제거해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
이만하면 김승욱 교수님으로서는 꽤 심하게 야단치시는 셈이다...
다시 대기실로 가서 이영미씨를 만났다.
"그 파스, 잠시 떼어야겠는데요..."
"꼭 그래야 하나요?"
이영미씨의 눈은 '제발...'하고 말하고 있었다. 이럴 땐 냉랭한 게 제일.
"시간이 없어요. 산도를 오염시킬 지도 모릅니다."
입술을 깨물고 한참을 망설이던 이영미씨가 드디어 무겁게 고개를 들었다.
"산실에는 몇명이나 들어와요?"
웬 엉뚱한 질문일까?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적게는 2명, 많으면 4,5명입니다."
"..."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간다. 그렇다면... 이제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신뢰를 얻어내야 한다.
"이것 보세요. 우리는 하루에도 몇 건씩 분만을 치러내고 있어요. 전 분만장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언제라도 잊을 준비가 돼 있어요. 다른 선배 의사들도 마찬가지고요... 우리의 관심사는 산모와 아기의 건강입니다. 그밖의 것은 몰라요.."
"... 김박사님을 좀 뵙고 싶어요..."
김승욱 교수님과 이영미씨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을까? 하여간 10여분 후에는 파스를 떼어낼 수 있었다.
짐작대로였다. 아니, 짐작보다 좀 심하다... 파스 아래의 살갗은 얼마나 오랫동안 덮여 있었는지 하얗고 오글쪼글한
잔주름투성이... 그리고 그 위에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담배불 자국으로 보이는 몇 개의 콩알만한 흉터와 '영미는 대철이가
XX다...'를 비롯한 저질스러운 문신들...
여고 시절 폭행당한 흔적이라고 했다. 남편에게도 알릴 수 없었던... 파스를 갈아 붙일 때마다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이영미씨를 괴롭히던 상처...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났다. 아니,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이영미씨는 출산 직후 일반 외과 병실로 옮겨졌고 보호자와의 면회도 차단되었다.
'화상 흉터'의 제거 및 피부 이식 수술이 있었던 것이다.
아기를 안고 퇴원하는 이영미씨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지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날로 잊혀졌다....
(staire의 글에서 가명은 본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이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산모의 나이를 비롯한 여러가지 배경들이 변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2. 며느리는 남이다?
이것은 staire가 직접 겪은 분만이 아니다. 그때 staire는 분만장 실습을 하는 날이 아니었으니까...
분만장 앞을 지나다 우연히 눈에 띈 광경... 마스크를 벗으며 나오는 의사의 손을 부여잡고 매달린 남편의 모습으로 보건대 난산인
듯했다. 의사는 "좀더 두고 봐야..."라는 말만 되풀이했고 시부모 아니면 친정 부모들로 보이는 다른 보호자들도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선배가 말했었다. 분만장에서 서성이는 할머니가 시어머니인지 친정 어머니인지는 난산일 때에만 구별할 수 있다고.
'어떻게요?'하고 궁금해하는 staire에게 그 선배는 '직접 겪어보라'고만 하셨다. 별로 듣기에 좋은 얘기는 아니라면서...
과연 보호자중 한 할머니가 의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의사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한쪽 구석으로 가는 거다. staire는 그들을 슬슬 따라갔다. 병원의 특성상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은 주목을 받지 않는다. 흔하니까...
병동 끝에 있는 층계참에서 할머니는 백에서 뭔가를 꺼내 의사에게 건넸다. 돈봉투겠지? staire는 방화문 뒤에 몸을 가리고 섰다. 그들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나즈막한 목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역시 시어머니였다...
"선생님. 우리 집에는 손이 귀하거든요. 산모는 어떻게 되더라도 제발 아기만은 살릴 수 없을까요? 초음파 검사로는 아들이라던데..."
그날 저녁 staire는 산과 병동의 차트를 있는대로 뒤져보았다. 다행히 어느 산모나 아기도 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요즘도
그 할머니의 얼굴을 상상해보며 오싹하는 전율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겉보기에는 인자한 모습이었는데... '산모는 어떻게
되더라도...' 라고 말하는 순간의 할머니의 눈빛은 어떠했을까......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5월18일(수) 08시02분20초 KDT
제 목(Title): 의대 시리즈 14 : 공포의 베팅
하느님 아버지
여기 제가 왔습니다
숙제 끝낸 어린애처럼 이렇게 손들고 섰습니다
부디 영수증 하나 끊어주세요
-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베팅 - bedside teaching을 이렇게 부른다 - 이 항상 공포의 대상은 아니다. 환자한 사람을 선택해서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임상 실기를 배우고 그동안의 수업 성과를 채점하는... 내과와 소아과의 필수 과정이다. 그렇지만 만일 담당교수가 최규완,
이정상, 방영주, 민경업, 고광욱, 홍창의, 안효섭... 선생님인 경우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오늘은 의대 시리즈 1편의 주인공 '재수 없는' 윤경이의 베팅날. 역시 운수가 사납다. 이정상 교수님께 걸렸으니...
이정상 교수님은 내과의 대표적인 냉혈한... 무시무시한 외모에 걸맞게 학생들을 사정없이 두들기시는 편이다. 신혼여행길에도 내과책
'Harrison'을 들고 가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하긴 해리슨(불어로는 아리송...)을 읽으시며 '아니... 이렇게 훌륭한
책이...'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는 다소 인간적인(?) 전설도 있긴 하지만...
첫 주에 최규완 교수님 베팅에서 늘씬하게 두들겨맞은 staire만이 느긋할 뿐, 실습생들은 분주하다. (최규완 교수님은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의 주치의를 지내신 꼬장꼬장한 양반... 이분의 베팅도 살기가 흐른다.) 윤경이 혼자서는 역부족이기에 온
실습조가 총동원되어 베팅 준비를 하는 거다. 재준이는 3시간 간격으로 환자의 혈압, 호흡수, 맥박수, 체온을 재어 정리하고
한성이는 차트를 요약, 노트한다. 윤경이는 주로 이론적인 질문을 받을 것에 대비, 교수님의 애독서인 '해리슨'을 며칠째 이잡듯이
뒤졌고...
드디어 약속시간... 멀리서 저승사자같은 구두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윤경이의 표정이 굳어진다. 교수님의 심기가 좀 불편하신
듯해서 병동은 긴장감에 휩싸인다. 교수님께서 staire를 보시는 순간 갑자기 표정이 험악해진다. (하긴... 원래 좀 험악하긴
하다.) 아침에 병동 복도에서 staire는 이정상 교수님과 마주쳤는데 먼발치에서 교수님께서는 staire를 민헌기 교수님 (이
분은 박대통령의 주치의셨다)으로 착각, 공손히 인사를 하시는 참사가 발생했던 거다...
애써 외면하는 staire를 잠시 노려보시던 교수님은 윤경이를 향해 차갑게 한 마디를 던지신다.
"발표 시작해..."
윤경이는 며칠밤을 새워 준비한 환자의 리포트를 읽어내려갔다. 여학생 특유의 섬세하고 치밀한 리포트... 이정상 교수님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으신 채 듣고 계셨다.
발표가 끝나자 갑자기 교수님이 일어서셨다.
"내과 실습생 치고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치밀하군. 직접 관찰, 조사한거야?"
물론 아니지... 그 리포트를 위해 땀을 흘린 사람이 한둘이 아닌걸요...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윤경인 빵점이다.
"예..."
자신없는 윤경이의 목소리... 교수님의 얼굴에 냉소가 스친다.
"그럼 어디 확인하러 가 볼까?"
에구... 이런 변고가... 윤경이는 책읽느라 바빠서 환자를 직접 보는 건 다른 애들이 거의 다 했는데... 다들 교수님 뒤를 따라 병실로 간다.
재수가 없으려니 하필 남자 6인실 환자다. 윤경이는 환자 얼굴도 가물가물할 텐데... 윤경이는 씩씩하게 한 환자의 침대로 걸어간다.
"김주용씨, 안녕하세요..."
"김주용씨는 저쪽인데요..."
으으... 끝장이군... 그러나 교수님은 태연하시다.
"혈압을 재봐..."
윤경이가 혈압대를 환자의 팔에 감았다. 그런데... 긴장해서인지 그만 거꾸로 감는거다. (거꾸로 감으면 에어 백에 공기를 넣을 때 혈압대가 벗겨져버린다.) staire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혈압대를 고쳐 감았다.
"넌 가만있어!"
위협적인 교수님의 일갈... "가진 것 다 내놔..." 할 때와 같은 목소리... 이제 혈압대 아래에 청진기를 찔러넣을
차례... 그런데 윤경이는 청진기를 자꾸 넣었다 뺐다 한다. Krotokov sound(혈압대에 눌려졌던 피가 혈압대 밑을
벗어나며 turbulence를 일으키는 '부걱 부걱'하는 소리) 가 안 들려서 당황하고 있는 거다.
당연히 안들리지... 아직 혈압대에 공기를 넣지 않았으니...
"그냥 하면 돼..."
재헌이가 한마디 하다가 역시 교수님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혈압을 제대로 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 순서로...
"Fundoscope... 볼 줄 알지?"
(Fundoscope 또는 ophthalmoscope : 망막을 들여다보는 장치. 환자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망막 동맥을 관찰할 수 있다.)
사실 본과 3학년 초반에 fundoscope를 제대로 볼 줄 아는 학생은 많지 않다. 볼 줄 모른다고 실토하는 게 좋을
텐데... 하지만 리포트엔 인턴 원태형 (소설가 박완서씨의 외아들. 레지던트 1년차때 자살하셨다...)이 대신 그려준 멋진 망막
스케치가 있으니...
윤경이는 환자의 오른쪽 눈에 fundoscope를 대고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갖다댄다.
그런데... 한성이가 병실 불을 끈다. staire는 커튼을 치고... 망막을 볼 때에는 조명을 낮추어야 하는데 윤경이가 또 깜빡한 거다.
"자네! 왜 자꾸 그래? 나가!"
에구... staire는 쫓겨나고 말았다...
병실 밖에서 족히 30분은 기다렸을 거다. 그동안 윤경이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병실을 나서는 윤경이의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을 보아 석연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교수님은 윤경이의 턱밑에 손가락 (엄청나게 길어요...)을 갖다대며
"도대체 실습을 뭘로 생각하는 거야..."
모두들 말이 없는 가운데...
"자네같은 의사는 필요 없어. 가운 벗어!"
버티면 안된다는 얘긴 선배들로부터 귀에 싹이 나도록 들었다. 윤경이의 가운을 빼앗듯이 받아든 교수님은 창문을 열고 밖으로 휙 던져버린다...
8층 높이에서 흐느적대며 떨어져 내리던 가운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흑..."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는 윤경이...
교수님께선 뒤도 안 돌아보시고 돌아서서 병동을 나선다. 굳어 있던 애들이 윤경이 주위로 우르르 몰려든다.
"괜찮아... 다들 그러고도 졸업해서 의사 잘만 하던데 뭘..."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5월28일(토) 06시34분35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5 : 필기가 문제라구요?
요즘 학생들, 너무 게을러.
내가 본과 다닐 땐 오른손으로 받아적고
왼손으로 그림 그렸는데...
- 서울 의대 박모 교수님의 말씀...
암기의 비중이 클수록 필기는 중요해진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우선 신나게 받아쓰기에 바쁜 곳이 의대 강의실이다. (근데 나중에 생각을 할 틈이...)
요즘은 강의 교재를 교수님들께서 직접 제작하여 나누어주시기에 부담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후배들을 보면 필기하느라 비명을 올린다. 더우기 교재라곤 거의 없이 모든 강의 내용을 필기해야 했던 staire 세대의 의대생들은...
믿거나 말거나... staire가 악필이 된 이유는 절반은 노트 필기 때문이다. 하긴 staire가 우리 학년 3대 악필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설득력이 거의 없지만...
1. 해부학
본과 1학년이 거쳐야 하는 가장 큰 난관이다. 차중익 교수님의 Head and Neck 강의는 수업 후의 '암호 맞추기'로
악명이 높다. OHP를 쓰시는데... 스크린에는 제목만 나열되어 있고 설명을 받아적을 틈이 없다. (제목만 다 써도 시간이 달랑
달랑하니...) 그래서 본과 1학년들은 팀워크의 위력을 이때 배운다. 3명 정도 팀을 이루어 한 명은 그림만 그리고 한 명은
필기. 한 명은 설명을 받아적는데... 수업 후에 세가지를 합쳐서 노트를 만드는 게 큰일이다. 실제로 어떤 팀(?)은 한 칸
어긋난 노트로 시험 공부하다 망한 역사가 있다. 제목 따로, 내용 따로, 그림 따로...
장가용 교수님의 복부 강의도 압권... 심한 날은 OHP 2개를 동원하실 때도 있고...애들이 그림 그리느라 설명을 안듣는 것같으면
"그거 그리면 뭐해. 책에 다 있는 그림인데..."
(이 말씀을 믿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 사실 그 '책'이란 교수님께서 보시는, 우리가 모르는 책임에 틀림없으니까.)
위(stomach)를 강의하시던 날... 교수님께선 검은 선으로 그려진 위장 그림을 OHP에 올리셨다. 윤곽뿐인... 그
다음엔 다른 필름을 한 장 겹친다. 붉은 색의 동맥 그림이 위의 윤곽과 겹쳐 나타난다. 그 다음엔 파랑색으로 그린 정맥 그림...
'음... 그림이 좀 복잡해지는군...'
그다음엔 노랑색으로 그려 잘 보이지도 않는 자율신경계...
'휴... 이거 어떻게 공부하나... 선들이 다 겹쳤네...'
(선만 있는게 아니라 한 줄 한 줄 이름까지 붙어 있다.)
그러나 교수님의 칼라 필름은 아직 반도 넘게 남았다. 녹색으로 그린 임파계, 갈색의 위벽 근육 섬유 방향, 이름도 모를 우중충한
색의 위벽 소화샘 분포... 교수님께선 한 장 치우고 새것을 덮으면 끝이지만 학생들의 노트는 오색찬란한 추상화가 되어간다.
(의대생들이 12색 볼펜이나 색연필을 애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생리학
생리학 교수님들께선 꽤 부지런하셔서 교재를 일찍부터 제작하셨다. 특히 김우겸교수님의 여유만만한 수업은 본과 1학년의 휴식시간이다.
"... 따라서... 이때... (약 3초의 침묵)...체내의... 소듐량이... 감소... 아니...아... 그래...
감소하는데... (5초)... 참으로... 이상하게도... (3초)... 포타시움과... 그... 뭐냐... 중탄산염은...
그 와중에 등장하는 실험동물은 빼놓지 않고 흑판에 그리시는데, 두루미가 나오던 날, 마치 화투장에 그려진 바로 그놈처럼 생긴 것을 정성껏 그리시는 거다.
"이녀석의 다리가... 그냥 긴 게 아니고... 얼음장 위에... 서 있을때... 발바닥은 0도지만... 허벅지는 (허벅지를 정말 탐스럽게 그리시며) 체온을... 유지하는데...그 비밀이 무엇인고하니..."
학생들은 하나라도 더 그리시게 하려고 마치 두루미를 처음 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지금 생각하면 그정도 연세에, 좀 느려서 그렇지 정말 명강의였다고 생각된다.)
3. 조직학
백발이 성성한 장신요 교수님의 넘치는 정열이 강의실을 메운다. 어느 토요일, 4시간 연강을 맡으셨다.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강의가 시작된다.
"Fibroblast는 그 기원으로 볼 때..."
화들짝 놀란 애들이 서둘러 노트를 펼치는 동안 교수님의 강의는 총알처럼... 그러시면서 교단으로 걸어오시고, 강의 노트를
펼치시고... 그러나 강의는 1초도 끊어지지 않았다. 더우기 그때로부터 4시간동안... staire는 집에 가서 어깨를 찜질해야
했다.
4. 생화학
박상철 교수님의 강의는 종이 많이 잡아먹기로 소문이 나 있다. 우선 복잡한 화학구조식을 그린 후 애들이 '휴... 다
그렸다...'하는 순간 한 귀퉁이를 지우시고는 조금 변형시킨다. (예를 들면 OH를 COOH로...) 도저히 다시 그릴 수가
없어 화학구조식의 몸체는 찐빵처럼 휙 그려치우고 바뀐 부분만 대충 표시한다. 이렇게 한시간을 보내고 나면 노트에는 찐빵이나
뭉게구름만 가득할 뿐 글자라곤 몇 개 없는 유치원생 노트가 되고 만다.
교수님께서 대사 과정을 강의하실 때에는 더욱 요주의... 복잡한 화살표와 관계된 효소 이름이 이리저리 가지를 뻗는데 주의할 점은
반드시 노트 중앙에서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 가지가 어디로 뻗을지는 교수님만 아시는 일이기에... 한귀퉁이에서 시작했다가
20가지 아미노산 대사과정을 반페이지에 다 그린 불행한 친구가 있었다. (결국 그 노트 보는 것을 포기하고 남의 노트를 복사하고
말았다.)
5. 미생물학
장우현 교수님의 강의는 항상 포카를 칠 때처럼 죄는 맛이 있다.
"Klebsiella... 이 균의 endotoxin 구조는 대장균의 그것과 같..........습니다."
같다는 거야, 다르다는 거야? 모든 학생들의 펜끝이 '같'자에 멈춰 있다가 교수님의 끝마디를 듣고서야 일제히 책상에 펜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참았던 숨을 내쉰다.
"... 이 균은 100도에서 30분간 끓이면 죽...........습니다."
휴...
최성배 교수님은 일명 Mister Jawetz. 야베츠 책을 그대로 복사해 오셔서 읽으신다.
학생들은 편한 자세로 앉아 책에 줄만 치면 된다. 복사기가 좀 시원치 않은지 가끔 더듬으시는데 이때는 앞자리의 학생이 책임지고 가르쳐드려야 한다. 진도가 늦으면 반드시 보강이 있으니까...
간혹 책에 없는 말씀을 하시더라도 긴장할 필요는 없다. Treponema pallidum(매독균) 강의 때 책에는 'dark field microscope로 관찰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다크 필드 마이크로스코프로 관찰할 수 있어요. 다크 필드 마이크로스코프가 뭐냐 하면... 균을 담은 슬라이드를 다크 필드 현미경 위에 놓고... 보는거에요..."
책에서 이 이상 벗어나셨던 예는 생각나지 않는다.
6. 약리학
성함은 잊었는데... 당시 조교였던 어느 분은 철자에 자신이 없으신 것도 아니면서 (우리가 노트와 책을 대조해 본 바로는
100% 정확함) 오른손에 분필, 왼손에 지우개를 들고 쓰시면서 슬슬 지우시는 거다. 도대체 짧지도 않은 약 이름을 3분지2
이상 흑판에 남겨두지 않으신다. 약리는 철자가 틀리면 감점이라는 설이 있어 학생들이 극도로 예민한데도... 'acetyl
salicylic acid' 정도 길이의 약 이름을 쓰실 때면 아세틸... 은 벌써 지웠고, 살리실릭.... 은 몸으로
가리시고... 빤히 아는 acid만 보인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요게 바로 아스피린...)
왕년의 인기 DJ 박원웅씨의 형(동생?)이신 박찬웅 교수님께서 하루는 '이 부분은 필기할 필요 없다'고 하시며 무슨 약품의 제조
공정을 적으시는 거다. 적으라는 것도 다 못받아쓰는데... 다들 펜을 놓고 편한 마음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마침내 한 칠판을
가득 메우신 후에야...
"이건 암페타민의 제조법입니다. 아시죠? 히로뽕..."
윽... 그렇다면 저 제조법은 황금알을 낳는... 허겁지겁 펜을 들었으나 이미 교수님께서는 한 쪽 귀퉁이부터 지우고 계시다...
7. 필기의 달인들
의대생들의 필기 동작은 일견 일사불란해 보인다. 누구나 펜을 대여섯 개 이상 움켜쥐고 (색색으로... 같은 것을 2개씩...
왜냐면 펜을 떨어뜨렸을 경우 허리를 굽혀 주울 시간이 없기 때문에...) 약간 앞으로 굽힌 자세로 잔뜩 긴장해 있다.
'이 부분은 중요하다...'라는 말씀이 떨어지면 '딱딱딱딱...'소리가 강의실을 울린다. 12색 볼펜을 쓰는 애들이 색을 바꾸느라고...
'음, 이거 잘못 썼네... 철자가 틀렸어요...'라는 말씀 뒤엔 좀 둔탁한 '툭툭툭툭...' 200여개의 화이트를 일시에 흔드는 소리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빠짐없이 받아쓰는 '옵세'들이 있게 마련...
옵세란 'Obsessive personality'의 준말인데... 필기든 공부든 유달리 집착해서 부지런떠는 애들을 약간 비꼬는 말이다.
(잠시 딴 얘기... 후배 중에 공부 안 하기로 유명한 녀석이 있는데... 어느날 그 녀석의 별명이 '건달'에서 옵세로 바뀐 걸
알았다. 후배들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 드디어 녀석이 마음을 잡았느냐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구요... 그애가 옵세라는 소리
한 번만 들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그러길래... 그렇게 불러주기로 했어요...")
잡담까지 받아적는 옵세가 있는가 하면 부지런히 (쓸데없는) 그림을 그려넣는 옵세, 시험에 나올 리 없는 "일설에는 이렇게 저렇게
주장하는 정신나간 학자가 있는데...난 개인적으론... 그런 거 안 믿어요..."라는 말씀까지 '일설에는 이렇게 저렇게 주장하는
정신나간 학자가 있음. 김용일 교수님은 개인적으로는 안 믿으심...'
이라고 쓰는 hyperobse까지 다양하다.
끝으로... staire의 여섯째 딸 지현이 이야기. 지현이는 글씨가 예쁘면서도 무지 빠르다. 그리고 중요한 곳에는 '폼폼'이라는 이름의 강아지 그림을 하나씩 그려두는 버릇이 있는데... 어느 후배가 전하는 이야기,
"제가 반도 못 받아쓰고는... 할 수 없이 옆자리의 지현이 노트를 넘겨다 봤더니... 그새 다 받아쓰고 벌써 폼폼이를 그리고 있더라구요. 그것도 3마리째..."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01일(수) 07시45분03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6 : 의대생의 사랑
그에게서는 늘 비누 냄새가 났다...
- 강신재, '젊은 느티나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어지게 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오랜 시간을 요하는지 나는 모른다. 에반젤린처럼 평생을 쫓아가기만
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 면에서 본다면 만 4년이 걸린 어느 의대생 커플의 경우는 오히려 행복한 편에 속하는 걸까?
staire가 점을 치기 시작한 지 7년째를 맞던 90년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경희(가명)는 밝았다. 한 마디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의예과 90 학번 신입생 중에 돋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늘 없는
그애에게 호감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집이 유복한 탓에 그렇다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일 지도 모르지만...
경희는 SNUMO에 가입했고 4월 들어서부터는 제 키만한 첼로를 메고 다니기 시작했다.
정현이(가명)는 무거웠다. 어두웠다고 해도 좋다. 같은 90 학번 신입생이면서도
다른 애들보다 두어 살 더 들어보이는, 글씨가 참 멋있을 듯하고 눈길이 서늘한 녀석이었다. 정현이는 어릴 때부터 다루던 바이올린을 들고 남들보다 좀 늦게, 5월에야 SNUMO에 들어왔다.
이들이 어떤 식으로 1년을 보냈는지 staire로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90 학번 신입생은 자그마치 28명이었고
요란스러웠다. 정현이와 단둘이 소주집을 찾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가을이 지나며 경희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지만 그게 무어 대단한 뉴스도 아니고...
생각해보면 그들과의 의미 있는 첫 만남은 1년이 지난 SNUMO 겨울 캠프부터였다.
캠프 마지막 날 저녁, (SNUMO 겨울 캠프는 졸업생 환송회를 겸한 훈훈한 자리가 마련된다) staire는 1년 후배들의 졸업을 보고 모처럼 감상에 젖어 꽤 마셨다.
많이 취한 상태에서 누가 staire 앞에 다가와서 앉는 걸 알았다. 경희였다.
"한 잔 주시겠어요?"
경희는 소주를 생각보다 잘 마셨다. 전에 알던, 그저 가볍기만 하던 모습이 아니다.
이제는 좀 성숙한, 즐거움과 함께 아픔도 알아버린 그런 얼굴...
"점을 치러 왔구나?"
"예, 해주실 수 있어요?"
"글쎄, 난 지금 좀 취해서... 아마 제대로 칠 수 없을 텐데..."
"부탁해요..."
그래서... staire는 경희와 함께 조용한 빈 방을 찾았다. 악보와 악기, 보면대가 어지럽게 널린, 연습실로 쓰던 작은 방. 펼쳐진 악보는 보로딘의 현악 4중주 2번...
물론 취해서 보는 점이 잘 될 리가 없고 staire는 카드를 노려보며 무척 많은 땀을 흘렸다. 클로버 퀸.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걸까? 경희의 얼굴을 바라보다 staire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니야. 경희의 모습에서 느껴진다. 아무리
취했다지만 그런 문제일 리 없다는 것... 그렇다면 이건 staire가 점장이 생활 8년만에 처음 만난 'stop
signal'이다.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틀린 점괘. 그런 경우엔 점을 다음 기회로 보류해야 하는 거다...
"경희야, 이건 stop signal이야. 더 이상 점을 진행할 수 없다는 일종의 경고와 같은..."
"그럼 어떻게 해요?"
"캠프 마치고... 서울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겠니? 그때 다시 처음부터..."
그러나 서울에서 경희를 쉽게 만날 수 없었고 시간은 흘러 5월이 되어서야 공대식당에서 경희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경희와 지난 가을부터 소문이 있던 같은 학년의 혁이(가명). SNUMO는 아니지만 인사성이 밝아 staire도 웬만큼 아는
녀석... 두 사람의 패는 밝지 못했다. 혁이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경희의 부모님께선 결코 이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으실
거다. 그리고 경희는 그걸 뛰어넘을 만큼 용감하지 못하다...
"혁이는 가난해요.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인 줄은 몰랐어요."
이들은 어느 새 결혼까지 생각하게 된 거다. 그리고... 물론 결혼은 소꿉장난이 아니다.
"이런 여건에서도 맺어질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아무리 패를 읽고 또 읽어도, 최대한 좋게 봐 주려 해도...
"1%도 안되겠는걸..."
경희는 눈물을 흘렸다. 언제나와 같은 담담한 표정에 아무런 구김 없이 무표정하게 흘러내리는 눈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헤어질까요?"
이쯤 되면 이미 점의 단계가 아니다. staire는 카드를 한편으로 밀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렇게 계속되다가 결국 떠밀려서 헤어진다면 상처가 더 크겠지요..."
"그래서... 헤어지고 싶어?"
경희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헤어져야겠지요. 한 일주일 울면 될까요? 아니면 한 달?"
staire는 마음 속으로 경희의 부모님께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그럼 헤어지지 마. 헤어지자고 다짐은 몇 번이든 할 수 있겠지만 넌 지금 그애와 헤어질 수 없어... 네가 원하는대로 해.
언젠가 네 말대로 떠밀려 헤어질망정 미리 겁먹고 물러서지는 마. 지금 너희들의 사랑은 그렇게 마음대로 맺고 끊을 단계를
넘어섰어... 물론 너희들이 끝까지 지금의 감정을 지켜나갈 수 있다면 언젠가 커다란 벽에 부딛히겠지. 그건 그 때의 문제야...
그보다는 네가 이런 어려운 가운데 너의 사랑을 얼마나 결연히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봐. 넌 아직
어려. 부모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너희들의 사랑이란 언제 깨어질 지 모르는 약한 거야."
경희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말없는 부정의 빛...
"그렇게 생각하니? 결코 변하지 않을거라고? 그렇다면 물러서지 마. 본과를 가게 되고 공부에 시달리고 세상을, 그리고 인생을
보는 눈이 더 깊어지면 아마 다시 오늘과 같은 선택의 순간이 올거야. 그 때가 되면 스스로 선택하는거야. 스스로... 지금
물러서면 언제까지나 후회만이 남을 거야...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잃은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아픔이 얼마나 큰 지 안다면
물러서서는 안 돼..."
경희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여자애들의 얼굴이란 얼마나 불가사의한 것일까?
눈물자위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이 저렇게 밝을 수 있다니...
"고마왔어요. 전 해낼 거에요..."
경희를 보내고 담배 한 대를 꺼내어 물었을 때 멀리서 정현이의 옆모습을 발견했다. 점치는 걸 보고 있었을까?
(계속)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03일(금) 05시51분46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6.1 : 의대생의 사랑
J'ai tant reve de toi que tu perds ta realite...
(내가 당신을 너무나 꿈꾸었기에 당신은 현실성을 잃었다...)
- 데스노스
(前承)
91년 봄의 SNUMO 예과 MT, staire는 아직껏 예과 MT에 빠진 적이 없다. 경희도 정현이도 같이 떠난 MT에서
staire는 경희에게 '바다의 선물'을 한 권 선사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또는 감사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주는
1000원짜리 책...
경희는 딸은 아니었지만 staire는 경희를 스머페트라고 불렀고 경희는 staire를 파파라고 불렀다. 결국은 7번째 딸로 정식 입적되었지만...
저녁에 모든 프로그램(음악 퀴즈, 게임...)이 끝나고 이제는 2학년이 된 정현이와 귀여운 신입생 영미가 잠시 물가에 같이
나갔다 돌아온 것을 staire는 놓치지 않았다. 잘 어울리는군... staire는 미소를 머금으며 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방으로 돌아왔다. 신입생과 2학년 선배의 술대결이 시작되었다. 여학생들은 옆방에서 여학생들끼리의 술자리를 마련했고... 드라이 진(원샷하기엔 좀 부담스러운 술이다)을 큰컵으로 한잔씩 돌린 후 본격적인 술고문...
그런데 정현이가 갑자기 옆으로 쓰러지더니 벽을 주먹으로 힘껏 때린다. 둔탁한 쿵 소리를 듣고 많이 다쳤음을 직감했다. 손을
주물러보니 뼈에는 이상이 없지만 아침이면 퉁퉁 부을 게 틀림없다. 잠시 영미의 모습이 스쳤다. 행복하기만 하던 둘의 모습...
무엇이 정현이를 저렇도록 폭발시킨 걸까?
정현이가 진정되고 나서 자리를 합쳤다. (옆방에서 여학생들이 들어왔다.)
경희가 staire 옆으로 왔다.
"넌 항상 취해서 가물가물할 때 오는군..."
"오빠는 그때가 편해요... 오빤 취해도 잘 보살펴 주시잖아요... 편해요..."
"그런가... 난 솔직이 너를 보면서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는데..."
"알아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게 좋은 걸요..."
무슨 얘길 했는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staire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 눈을 뜬 staire는 좀 놀랐다. 경희의 얼굴에 눈물자국이 남아 있다.
"남자애들이랑 좀 싸웠어요... 제가 첼로 파트장이 될 수 없대요..."
경희는 누구보다도 연습을 열심히 했고 후배들에게도 정성을 많이 기울이는데...
여자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거겠지. SNUMO는 보수적인 의대의 풍토를 그대로 반영한듯 여자 반장이나 악장은 커녕, 여자 파트장도 드물다...
경희를 위로해주느라 정현이에게 신경도 못쓰다가... MT 마치고 정현이와 맥주집을 찾았다.
"어젯밤엔 왜 그랬니? 영미 때문에?"
"형, 보셨어요?"
"..."
"사실은, 영미가 제게 그랬어요...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그런데 왜?"
"실은... 전 경희를..."
음... 점을 치다 보면 제일 괴로운 게 이런 경우다. 점장이는 자신이 친 점에 대해 입을 닫아야 하고... 그래서 가끔 녀석들의 어긋난 모습을 발견하는 거다.
"하지만 경희에겐 혁이가 있잖아..."
"혁이보다 제가 먼저에요... 작년 3월에... 새벽에 28동 앞을 지나는 경희를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희미한 햇살에 반쯤 비낀 옆모습..."
"하지만 그것뿐이잖아..."
"예... 저 혼자만의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늘 경희의 옆모습이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렇지만... 그건 이유가 안된다. 경희도, 정현이도 staire가 무척 아끼는 후배...
둘이 참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을 새삼스럽게 해봤지만...
"그건 안 돼. 우선 영미에게 잔인한 짓이고, 넌 이미 혁이에게 졌어. 그건 인정해야지... "
"알아요. 그래서... 너무 답답해서..."
정현이에게 그 점의 결과를 말해주고 싶었다. 경희와 혁이는 반드시 헤어지고 말 거라는... 좀더 기다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점장이의 입은 무거워야 한다...
가을, 예과생들이 연주회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은영이, 석한이, 현승이, 경희는 한 팀이 되어 곡을 고르고 있었다. 악기
실력들이 꽤 있는 애들이라 staire는 슈만의 현악 4중주 2번을 추천했다. 정현이는 영미와 한 팀이 되어 하이든의
세레나데를...
혁이는 경희네 슈만 팀 연습에 빠짐없이 들어와 악보를 넘겨주기도 하고 잔심부름도 하며 주위를 돌았다. SNUMO 후배는 아니지만
멋진 녀석... 음악이 돈 많은 이들만의 것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혁이의 감각은 예민해서 연습 지도를 하던
staire를 머쓱하게 하기도 했다.
언제나처럼 슈만을 연습하다가 제 1 바이올린 은영이가 수업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한 번 해볼까?"
staire는 갑자기 슈만을 직접 연주해보고 싶어진 거다. 예과 시절에 연습한 적이 있는 곡이니 초견으로 될 지도 모른다...
은영이의 악기는 좀 작고 가벼웠지만 4사람은 곧 슈만의 선물을 맛보기 시작했다.
제 2 바이올린 석한이의 풍부한 저음, 비올라 현승이의 무게 있는 솔로... 경희의 신비롭게 울리는 첼로의 아르페지오를 타고
흐르는 staire의 선율... '오르페우스의 창'에 나오는 다비드, 라마핀, 크라우스의 현악 4중주가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은 소개되지 않았다) 세바스찬 음악학교의 연습실을 울리듯 저녁 햇살이 비쳐드는 음대 연습실에서 5사람은 음악에
빠져들어갔다...
그렇지만... 경희의 뒷모습과 손놀림을 멍하니 바라보는 혁이의 부러운듯한 눈길...
그리고 이 자리에 staire가 아닌 정현이가 앉아 제 1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면...
그런 생각으로 음악은 조금 흐트러졌다. 아주 조금... 경희의 눈빛이 staire를 향했다. 약간 바쁘게 경희가 새기는 저음
박자에 다시 몸을 실은 staire... 안정을 되찾고 시원스럽게 긋는 경희의 오른팔... 경희의 옆모습은 사랑스러웠다.
가슴아프도록... 믿음과 사랑... 그것이 빠진 연주는 앙상블이 되지 않는다.
4사람은 서로의 눈길을 나누며 연주에 깊이 잠겨들었다...
(계속)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05일(일) 03시46분21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6.3 : 의대생의 사랑
Ignotum per ignotius...
(알 수 없는 것을 더욱 알 수 없는 말로 설명하다...)
- Thomas Aquinas
본과 1학년 여름을 맞은 경희의 편지를 받았다.
"상처를 입었습니다. 한 달쯤 전에 떨어진 커다란 바위가 아직도 비직비직 저를 아프게 합니다..."
본과 생활에 쫓기던 경희와 혁이가 위기를 맞았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위로의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정현이를 생각한 것인가? staire는 점장이의 선을 넘고 있었다...
가을쯤에 정현이마저 영미와 좋지 않은 결말을 보았다. staire의 딸이 되기를 거부했던 유일한 아이 영미...
겨울 캠프, staire의 졸업생 환송회가 있는 캠프였다. staire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주 악보를 몇 개 들고 캠프를 떠났다.
캠프 첫날밤. 경희를 만났다. 혁이와 어떻게 되었다는 얘기는 없었지만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의대생의 사랑... 그것은 몇가지 단계가 있어. 대개들 그 틀에 놀랍도록 잘 맞아 떨어지지. 우선 예과의 평범한 시기. 이
때의 사랑은 다른 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그렇지만 본과에 올라가며 많은 변화를 겪게 되지... 우선 본과 진입 직후의
혼란기. 공부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정리하기도 하고 그동안 숨겨졌던 커플들이 좁아진 캠퍼스로 인해 일제히 공개되는..."
"맞아요. 우리 학년들도 그랬어요."
"그 다음엔 본과 1학년 중반의 위기... 과도한 스트레스에 서로를 감싸줄 여유들을 잃어 가는 시기... 많은 커플들이 이때 깨어지는 거야."
"그것도 맞아요..."
경희의 얼굴에 쓸쓸한 그림자가 스친다...
"그다음은 본과 2,3학년의 free radical reaction phase... 무수한 커플들의
anastomosis(의대생들은 다 아는 단어... '이합집산')가 일어나는데... 잘 살펴보면 깨어진 커플들의 '조각'들이
멀쩡하게 공부 잘 하던 안정된 분자들을 때리며 반응이 일어나는..."
경희는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부터는 경희도 잘 모르는 얘기인 것이다...
"그리고 본과 3학년 후반의 성숙기. 남자애들은 의사와 결혼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시기인데 대부분 '편한 마누라'를 원하기
때문에 과 여학생들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식어가지. 반대로 여학생들은 자신을 이해해줄 남자는 의사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고...
"
"음... 전 그럼 의사와 결혼해야겠네요. 제 야망은 두가지에요. 야망... 이라기엔 좀 우습지만요... 하나는 의사가 되는 것, 또 하나는 엄마가 되는 것..."
"마지막으로 4학년때의 결혼 붐이지. 수많은 과커플들의 결혼이 이루어지는데 대체로 원래 사귀던 애들이 아닌 새로 이루어진 커플들..."
곁에 앉았던 예과생 성욱이가 뜻모르는 웃음을 지었다...
졸업생 환송회는 저녁 8시부터 시작되었다. 그전에 정현이를 만나 이중주 악보를 전해 주었다.
본과 4학년들의 순서가 하나하나 지나가고 마침내 공대 4학년 staire의 차례...
딱 10년에 걸친 학부생으로서의 SNUMO 생활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본과 1학년들이 한사람씩 졸업생의 프로필을 소개하고 선물을 전한다. staire에게 선물을 전하는 역할을 맡은 것은 경희였다.
"작년, 재작년에도 졸업하시는 선배님들을 떠나보냈지만 이 분의 졸업을 맞아 저는 처음으로 선배를 잃는다는 느낌에 가슴이 아파오는 걸 느낍니다. 인자한 아버지였고 늠름한 선배이셨죠..."
아니... 이런 과찬의 말씀(?)을... 경희는 고개를 숙이고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그동안 저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 수학, 물리, 유기화학, 물리화학,해부학, 병리학, 마이티(?), 화성법과 실내악, 그리고 푸가의 아름다움... 강민형 선배님의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경희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선물을 전달받으며 경희와의 악수... 손이 차갑다. 그렇지만 경희는 내 손에서 따스함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며 손을 꼬옥 쥐어주었다. 그리고 귓속말...
"정현이에게 가 봐... 재미있는 악보가 있어..."
떠나는 자리에서의 마지막 인사...
"전 너무나 오랫동안 대학생이었어요. 이제는 학생이 아닌 저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기간이었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학생으로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불현듯 4년 전의 이 자리가 떠오른다. 공대 신입생이 된 staire가 왔던 연이와의 겨울 캠프. 졸업하는 동기들을 축하해주러 왔다가 뜻밖에 같이 환송을 받았다.
내 감사패는 따로 주문해서 만든 것으로 다른 애들의 것에 '선배님의 졸업을 축하드리며...'라고 되어 있는 데에 비해 내것에는 '선배님의 새출발을 축하드리며...'
라고 씌어 있었지...
선배가 어떻고 음악이 어떻고... 하는 실없는 얘기를 하다가 그만 목이 메었다...
"...저는 여러분을 잊지 못할 거에요. 아니, 여러분 곁을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왜냐 하면..."
그날 밤, 작은 연습실에서 경희와 정현이가 머리를 맞대고 이중주를 연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끝)
* 덧붙임 : 이 글이 처음 씌어진 94년 6월로부터 20개월이 지난 금년 2월, 본과를 졸업하며 경희와 정현이는 결혼했습니다. *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07일(화) 06시09분04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7 : 81 병동의 거머리
O let me be awake, my God!
Or let me sleep alway.
- Coleridge,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에서
연휴를 맞아 꼬박 이틀 반을 철야하며 수없이 이런 기도라도 올리고 싶었다. 나를 깨워주소서. 그게 안된다면 차라리 영영 잠들게 하소서... 본과 3학년이던 어느날, 잠에 취해 저질렀던 어이없는 실수의 기억과 함께...
손가락 끝의 감각이 꽤 예민한 편인지 혈관을 찾아 찌르는 데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한 것은 실습 1주일만이었다. 처음엔 빤히
보이는 혈관도 잘 못찌른다. 그러나 연습을 거듭하다보면 차차 감각이 붙는다. 잘 안보이는 혈관도 느낌만으로 찔러 들어가게 되고,
주사바늘 끝에서 미끄러져 달아나는 혈관을 쫓아가 찌르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데에는 1달이면 충분하다. 근데 staire는 불과
일주일만에 그 단계에 도달한 거다.
이제 실습생이 맡은 채혈과 정맥주사는 대부분 staire가 처리하게 되었다. 아침 6시까지 출근(?)해서 간호사들이 챙겨둔
order에 따라 졸린 눈을 비비며 시험관과 주사기를 들고 병실을 돌며 채혈... 8시 수업을 마치고 9시반에 병동에 올라와
다시 병실을 돌며 정맥주사... 인턴의 총애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건 원래 인턴의 일이거든.
어느샌가 staire는 '81 병동의 거머리'라 불리게 되었다. 처음엔 흡혈귀... 였지만 간호사들은 거머리라는 별명이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피뽑는 일을 도맡아 한다는 뜻이다...
staire가 특히 즐겨 쓰는 기술은 동맥 찌르기... 원래 채혈은 정맥에서 한다.
그러나 ABGA (Arterial Blood Gas Analysis : 동맥혈 가스 분석)를 위해 동맥혈을 뽑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동맥 속의 산소, 이산화탄소, 중탄산염 등을 측정하기 위해서... 손에 익으면 정맥 찌르기보다 보다 쉽기 때문에 정맥을
찌르기 어려운 환자의 채혈을 위해 ABGA가 아닌 경우에도 가끔 쓴다...
그날 아침에도 staire는 졸음을 참으며 채혈을 하고 있었다. 우선 간염 환자의 정맥 채혈... 대개 cubital
fossa(팔꿈치 앞쪽의 오목한 부분)에서 뽑는다. 환자는 온 몸이 퉁퉁 부어 있어 정맥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staire는
살짝 비치는 가느다란 정맥 줄기를 발견하고 고무줄을 감았다. 고무줄의 압력으로 인해 정맥혈이 심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맥에
고이면 좀더 찌르기 쉬워진다. staire가 시키는 대로 환자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근육이 수축하며 앞팔에 남은 정맥혈을
짜 주면 정맥은 좀더 부풀어오른다. 그래도 여전히 희미한 정맥... 손으로 더듬어 보았지만 혈관의 부피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괜찮아... 이건 충분히 찌를 수 있어... staire는 주사바늘을 눕혀 환자의 팔을 찌른다. 꿈틀하며 바늘 옆으로 미끄러져
달아나는 혈관의 감촉... 이제는 눈으로 볼 필요가 없다. 손감각만으로 해야 한다. 바늘을 약간 후퇴시켰다가 다시 밀어넣는다.
오른손으로 (staire는 왼손잡이) 혈관이 지나는 부분을 당겨 미끄러지는 걸 최대한 막으며 바늘 끝이 혈관 벽을 긁는 걸
느낀다. 주사기 끝에 빨갛게 피가 비친다. 성공! 고무줄을 풀고 피스톤을 슬슬 당기며 피를 빨아들인다. 필요한 3cc를 다
뽑고나서 솜을 대고 누르며 바늘을 뺀다.
"문지르지 마시고 솜으로 꼭 누르세요... 문지르면 피멍이 맺힙니다..."
습관이 돼버린 말을 중얼거리며 피를 시험관에 옮겨담는다...
다음 환자는 ABGA. 이것도 반복하다보니 과정을 다 외어버렸다. 우선 주사기와 시험관용 고무 마개를 준비한다. 고무줄은
필요없다. 환자의 손목을 더듬으며 맥박을 잡아낸다. 동맥을 찾는 거다. 일단 찾은 동맥을 아래위로 더듬으며 동맥의 진행 방향을
확인한다. 동맥은 정맥과 달리 비교적 곧게 뻗어 있어 쉽게 방향이 잡힌다. 그 다음엔 바늘을 수직으로 세워 단숨에 찔러넣는다.
물론 눈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동맥이 눈에 보이는 경우란 동맥경화증 환자의 관자놀이나 귀 앞 같은 곳뿐이다) 손끝에
느껴지는 맥박의 위치로 잡아내는 거다. 주사기 끝에 피가 비친다. 동맥은 혈압이 정맥보다 높아 힘주어 당기지 않아도 쉽게 빨아낼
수 있다.
"솜은 문지르지 말고 가만히 누르세요. 적어도 5분동안..."
정맥보다 오래 누르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 솜을 대고 누르며 바늘을 뽑는다.
즉시 고무 마개를 주사기로 찌른다. 동맥혈의 산소 함량을 측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깥 공기와 닿지 않도록 하는 거다. 반창고에
환자의 이름과 날짜를 써서 붙이고 냉장고에 넣는 것으로 끝... 냉장고에 넣는 이유는 적혈구 등 세포들의 대사과정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적혈구들이 계속 산소를 소모하거든...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최성재 교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이런 아침 시간에 올라오시는 건 드문 일인데...
교수님은 scleroderma(공피증) 환자를 보러 오신 거다. 그건 좀 드문 병인데...
온몸의 혈관과 결합조직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대책없는 병이다. 오늘 아침 용태가 급격히 나빠져 올라오셨다고 하는 얘기를 들으며 병실로 들어갔다.
환자는 40대 중반의 아주머니... 갈 데까지 간 것같았다. 손가락 끝의 혈관들이 막혔는지 손끝이 거무스레 죽어 있었고 피부는 두툼하게 부풀어 흡사 살색 가죽장갑이라도 낀 것같다...
"우선 혈액을 좀... 빨리!"
교수님의 지시에 따라 인턴이 혈관을 찾는다. 그러나...
"혈관이 다 막힌 것같아요. 잡히질 않는데요..."
잠시 모두들 당황했다. 그때,
"야, 거머리. 네가 해 봐."
주치의의 목소리에 문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staire가 놀라 정신을 차렸다.
"자네가 81병동 거머린가? 해 보게..."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안 할 수도 없다...
환자의 피부는 코끼리의 그것처럼 거칠고 두꺼웠다. 정맥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staire는 환자의 손목을 힘주어 쥐고 맥을 찾았다. 동맥을 찾는 거다.
교수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녀석 좀 보게... 하는 표정.
희미하지만 분명히 맥이 잡힌다. 보통때보다 좀 가는 24호 바늘(번호가 높을수록 가늘다. 보통의 채혈은 18 - 21호로 한다.
헌혈할 때 쓰는 굵은 바늘은 대개 13 - 16호)로 힘주어 찌른다. 수축된 혈관이라 가는 바늘을 택한 거다. 평소보다 좀더
세게 찌른다... 됐어! 검붉은 피가 빨려나온다. 동맥혈인데도 검붉다는 건 산소 함량이 심하게 떨어졌다는 뜻이겠지... 과연
다급한 상황이었군...
staire는 피를 시험관에 옮겨담고 가운 윗주머니의 펜꽂이에 단단히 꽂았다. 이마에 땀이 비오듯 흐르는 걸 그때서야 느꼈다...
"잘했어. 과연 거머리야..."
긴장이 풀리며 졸음이 다시 밀려왔다... 그때... 멍청한 staire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솜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갑자기 왜 그랬을까? 바보같이...
윗주머니에 꽂아둔 시험관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staire의 가운 앞자락을 적시며 병실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피...놀란
교수님과 주치의, 인턴, 환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staire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말았다...
"허허... 저 거머리는 뽑는 것만 잘하는군..."
교수님께선 웃으시며 익숙한 솜씨로 금방 다시 피를 뽑으셨다. 그것도 정맥에서...
어떻게 정맥 채혈이 가능할까? 저런 분 앞에서 얕은 재주를 뽐내려 했으니...
병동은 다시 분주해졌으나 가운을 입은 채 병실 바닥에 주저앉은 staire는 한동안 일어날 수가 없었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18일(토) 10시19분50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8 : 걸렸군...
하나의 개념, 하나의 형상, 하나의 존재가
푸른 하늘로부터 진흙투성이의 납빛 지옥의 강에 떨어진다.
그곳에서는 하늘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 보들레르, '축복' (시집 '악의 꽃'에서)
악몽인가... staire는 소스라쳐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이마가, 아니 온 얼굴, 온몸이 펄펄 끓는 듯하다.
비틀거리며 간신히 베갯머리에서 기어나와 서랍을 열었다. 뒤적뒤적... 체온계를 찾았다. 체온은 자그마치 40도 8부.
열을 조금이라도 식혀보려고 맨바닥에 누워서 생각해본다. 이상한 것을 먹지는 않았고... 그래... 이건 사나흘 전부터 앓던
가벼운 감기 때문이야. 그런데 정체가 뭐지? 대개 어떤 병이든 초기 증상은 감기 비슷한 법이니... 좀더 앞으로 거슬러 가며
감기로 시작되는 병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열에 뜬 머리로는 잘 안되지만...
앗...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불길한...
staire는 억지로 몸을 추슬러 일어나 내과책을 꺼내어 장티푸스(typhoid fever)를 펼친다.
'초기 증상 : 가벼운 감기, 피로감, 식욕부진, 두통, 오한과 열...'
음... 이건 도움이 안된다. 대개의 병이 다 이렇지... 그렇지만 장티푸스가 아니라는 확증은 없다.
'잠복기 : 약 1주일'
일주일? 가만있자, 일주일... 그렇군. 일주일 전이면 지난 주 수요일, 아니 목요일인가... 하여간 '전염병동' 실습중이었던 그 시기... 그때 staire가 담당한 환자는... 으으으... 장티푸스다.
'주요 증상 : 8주 이상 지속될 수 있는 고열(39-40도)이 무엇보다 특징적이다. 그리고 서맥(bradycardia : 맥박이 늦어짐)...'
시계를 꺼내어 맥을 짚는다. 어지럼증이 심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서맥은 아니야... 그럼 그렇지...
그러나...
'서맥을 보이는 환자는 전체의 30 내지 40%에 불과하다.'
으으... 얄밉도록 무표정한 설명이군. 그럼 이딴 소린 책에 왜 적어놓은 거야...
'복통과 복부 팽만감'
그런가? 좀전엔 몰랐는데 읽고보니 배도 좀 이상하다.
'윗배와 앞가슴에 특징적인 붉은 반점'
옷을 걷어 본다. 분명히 그런 건 없다. 그렇지만... '반점은 2주째에 나타난다...'
그럼 아직 모르는 일?
'발병 첫주의 특징으로는 간과 비장의 종대(붓는다). 간과 비장을 만질 수 있다.'
누워서 간과 비장을 짚어본다. 만져진다... 숨을 들이쉬며 배를 부풀리는 순간 손바닥에 느껴지는 부피감...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니, 적어도 staire는 그렇게 생각했다. 걸렸군... 1종 법정 전염병인 장티푸스. 생존율이 얼마더라?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치사율 12%'
치사율이 끔찍스럽도록 높다. 열에 한 명 이상이라니... 그걸 읽는 순간 어지럼증이 심해지며 잠시 아찔한 느낌. 안 돼, 난 살아야 해. 항생제, 항생제...
구급 상자를 꺼낸다. 장티푸스에 특효라면 chloramphenicol. 그렇지만 그건 없다. 그럼? 아스피린... 아냐.
장티푸스에 아스피린은 금물이다. 스테로이드... 그래, 스테로이드. 하지만 구급 상자 속의 스테로이드는 스테로이드 연고 뿐이다.
저걸 먹어? 아니면 이마와 배에 발라 봐? 아냐... 침착, 침착...
'Chloramphenicol을 쓸 수 없는 경우엔 ampicillin, amoxicillin...'
하필 집에 없는 것뿐이다.
'... 또는 trimethoprim과 sulfamethoxasole의 복합 처방...'
음... 그 복합처방은 낯이 익어... 근데 그 복합 제제의 상품명이 뭐더라...
그 두 가지에다 bacitracin을 섞었던가 ... 아닌가...
현기증이 한층 심해진다. 방바닥에 누워 이리저리 구르면서 필사적으로 그놈의 상품명을 떠올렸다. 그래... 박트림... 마침 박트림이 있다. 휴... 살았다.
약을 먹어도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 해열제가 있으면 좋을텐데... 근데 아스피린은 왜 안되는걸까? 해열제로는 그만인데... 내과책에는 역시 무표정한 설명이 붙어 있다.
'아스피린은 장출혈과 장파열을 촉진시키므로 금한다.'
그렇지. 장티푸스의 가장 심각한 부분이 바로 장출혈과 장파열이니...
그럼 소화기에 무리를 주지 않는 acetaminophen(상품명 : tylenol)은 어떨까? 그건 책을 찾아볼 필요도 없다.
구급 상자엔 빈 통만 달랑 구르고 있었으니... 할 수 없이 살모넬라균(Salmonella typhi)과의 싸움은
항생제만으로... 열에 들떠 잠을 이루지 못하고서 이리저리 뒤척였다...
얼굴에 비쳐드는 햇살에 눈을 뜨고보니 10시다. 지각이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박트림을 두 알 더 먹고 학교로 향했다.
"저어... 늦은 건.. 다름이 아니라... typhoid fever 때문에..."
"뭐? typhoid?"
"예... 아무래도 지난 주 전염병동 실습때 전염된 것같아요."
"증상이 어땠는데?"
"열이 40도 8부. 간이 만져지고..."
"그리고?"
"... 생각해보니 그것밖에 없네요..."
최강원 교수님(전염병 전문가)은 한심하다는 눈치...
"간이야 열이 날 때 붓기 쉬운 거 아닌가? 좀더 specific한 게 필요한데..."
"글쎄요... 하지만 지난 주에 전염병동..."
"자, 자, 하루 사이에 열이 뚝 떨어졌다면 아무리 항생제가 좋기로서니 장티푸스는 아냐. 정 의심스러우면 혈액 검사를 좀 해 볼까?"
"아, 아닙니다..."
"혈액 검사에서 봐야 하는 게 뭐지?"
에구... 이건 긁어 부스럼이다.
"에... 또... leukopenia(백혈구 감소)..."
"얼마나?"
"3000, 아, 아니, 4000인가..."
"그리고?"
원래 교수님이란 학생들이 대답 못할 때까지 질문하시는 법이며 잘못했다는 소리를 들으실 때까지는 고삐를 늦추지 않으신다. 전날 밤 내과 책에서 읽은 밑천이 다 떨어지고도 실컷 더 시달린 끝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휴... 환자를 이렇게 다루는 의사가 어디 있담?'
그나저나... 그날 밤의 고열의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의대생이 있다면 전염병동에서 단단히 주의하시기를... 아, 그리고 구급상자는 늘 꽉꽉 채워둡시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21일(화) 21시40분21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9 : 생쥐와 인간(?)
"왕께서는 언젠가 소를 구해주신 적이 있다면서요?"
"아.. 그 일... 밖에서 구슬픈 소 울음 소리가 나기에 내다보니 제사에 쓸 소를 끌고 가는 중이었소. 그 처연한 울음소리가 가슴을 저미는 듯하여 사람들에게 일러 소를 살려주라 한 적이 있소."
"그럼 제사는 제물 없이 지냈습니까?"
"그럴 수야 없는 일... 소 대신 양을 쓰도록 했소이다."
"소 대신 양을 쓰도록 하신 이유는 소 값이 양보다 비싸기 때문에 소가 아까와서 그러신 것은 아니지요?"
"아니외다. 소의 가련한 울음소리를 듣고 측은해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오."
"그럼, 왕께서는 소는 가련하고 양은 가련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허어... 이치가 그렇군...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소."
"아닙니다. 부끄러워 하실 필요 없습니다. 소를 측은히 여기셨으나 양을 헤아리지 못하신 것은 소의 울음 소리를 들었으되 양의
울음 소리는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치와 사리를 논하기 이전에 눈앞에 있는 것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곧 어짊(仁)인
것입니다."
- 맹자 (맹자와 어느 왕의 대화)
85년의 어느 화창한 봄날, 본과 1학년이던 staire는 실험실 앞을 지나다 실험실 앞뜰에서 흰 쥐 한 마리를 발견했다.
몸길이 약 10cm 정도(꼬리 빼고)의 귀여운 mouse. Rat은 몸길이가 거의 20cm에 달하고 징그러운 느낌을 주지만
mouse는 귀엽기만 하다.
녀석은 풀숲 사이를 이리저리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움직임이 굼뜨고 비실대는 느낌. 쥐란 동물은 상당히 재빠른 녀석들인데...
'뭔가 사연(?)이 있어...'
staire는 손을 뻗어 쥐를 안아 올렸다. 쥐는 순순히 손에 올라 앉았다. 가까이 놓고 보니 더 귀엽다. 새하얀 털빛, 빨갛고 큰 눈, 약간 풀이 죽어 처진 흰 수염, 그리고 분홍빛 발...
'이걸 집에 데려가 길러 볼까? 하지만 혹시 미생물 실험실에서 폐렴균이라도 잔뜩 먹여둔 쥐라면? 아니면 어느 실험실에서 실험 도중에 도망쳐 나온 녀석일지도...
만일 그렇다면 실험실에선 이 쥐를 애타게 찾고 있겠지?'
그래서 쥐를 데리고 생리학 실험실로 갔다. 생리학 조교들은 그 쥐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했고 그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괜히 여기저기 찾아다니지 말고 그거 사육실에 맡겨. 거기서 관리하게 돼 있거든."
무표정한 사육실 직원에게 쥐를 건네주며 왠지 섭섭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새 꽤
정이 들었는데... 몇 번이나 돌아보며 문을 나서는 staire를 빤히 바라보는 녀석의 힘없이 처진 수염과 울먹한 느낌의 빨갛고 맑은 눈... 그 눈빛을 한동안 잊을 수 없었다.
1년이 지났다. 어느 새 그 쥐에 대해선 까맣게 잊은 staire는 2학년이 되었다. 아마 녀석을 만난 지 꼭 1년이 되는 무렵이었을 거다. 그날은 약리학 실습이 있었다.
그날의 실습은 한마디로 '죽음의 제전'. 두 가지 실험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rat을 이용하는 것으로 병에
마취제(halothane이던가?)를 넣고 rat을 한마리씩 집어넣어 죽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재는 것이고 또 하나는 800마리의
mouse(mice?)를 40마리씩 20조로 나누어 마취제 농도를 달리 하며 주사해 30분 간격으로 죽은 mouse 수를 세는
실험.
Rat 들은 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저항을 했다. 녀석들도 그 병이 아우슈비츠(?)임을 본능적으로 아는 걸까? 실험은 쥐들과의 실랑이로 지지부진했다. staire의 실험조만 빼고...
이상하게도 실험 동물들은 staire의 말을 잘 들었다. 아마 staire에게 짐승스런 면이 많이 남아 있어 그런 것일까? 다른
조에서 한 마리를 집어넣지 못해 끙끙거릴때 이미 staire는 네 마리째를 처리하고 있었다. 배를 왼손으로 감싸고 오른손으로
등과 머리를 쓸어주며 병주둥이로... 그런데 이 녀석만은 staire가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필사적으로 허리를 뒤틀어
staire의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조교가 달려와 쥐를 붙잡았다.
"이거 보라구. 이런 쥐는 조심해서 다뤄야 할 거 아냐..."
쌀쌀맞기로 유명해 KGB라 불리는 약리학 조교가 손가락으로 쥐의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쥐의 배에는 두 줄로 젖꼭지가 나
있었다. 암컷이다. 그런데 평소에 비해 젖꼭지가 크고 선홍색을 띠고 있었다. 임신한 것이다... 방어 본능이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staire는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상처는 깊었다. 두 줄로 찢어져 피가 솟고 있었다. 준비실로 달려가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실험실로 돌아와보니
KGB가 애들을 야단치는 중이었다.
"또다시 이런 식으로 소란을 피우면 전부 0점처리할거야..."
staire를 보고도 많이 다쳤느냐고 묻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KGB는...
'잘 됐어. 이참에 좀 쉬자....'
창가에 앉으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창밖은 화창한 봄날. 비쳐드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두 번째 실험이 시작되었다. 할당받은 40마리의 쥐에 주사를 놓기 시작했다. 이번엔 조그만 mouse여서 애처로움이 더했다.
staire의 조는 비교적 농도가 낮은 편이라 반 이상 죽지 않는다고 한다. 벌써 쓰러져 굳어가는 녀석들을 골라내며 숫자를
기록하느라 다들 바쁘다. staire만 창가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물린 손이 쓰리고 욱신거려 도저히 실험에 참가할 수
없었다.
"끝까지 살아남은 쥐는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해치워야지. 제한 시간(3시간) 되면 숫자 기록하고 살아남은 놈들은 치사량을 주사해서 전부 죽여버려..."
비정한 KGB... 하긴 살려둘 의미가 없다. 이미 약물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실험용 동물로서의 가치를 잃은 것이다. 살려
두어도 며칠을 넘기지 못하리라. 하지만 꼭 저렇게 표현해야 할까... 해치워... 죽여버려... KGB는 학생이나 쥐나 똑같이
대하는거야...
비실대는 쥐들 중에 제법 똘똘한 녀석이 있다. staire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눈빛... 그랬다... 1년 전에 만났던
쥐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이제 알 것같다. 스스로 달아날 수는 없는 일이니 누군가 쥐 한 마리를 도망시켜 준 것이리라. 녀석이
왜 비실거렸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때 만났던 쥐는 며칠 안에 죽었겠지.
KGB는 통계 처리 방법을 강의하고 애들은 필기하느라 바쁘다. 아무도 창가에 앉은 staire에게 신경쓰지 않는다...
테이블에는 유리병 속에 이미 죽은 rat들이 뒹굴고 있다. 임신한 쥐도 퉁퉁 불은 젖꼭지를 드러낸 채 죽어 있다. 어미 쥐의
필사적인 저항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단지 죽기 위해 동원된 쥐들이지만 그들에게도 생명은 소중한 것일까? 목숨을 걸고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쥐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모성애와 같은 것일까... 1년 전 staire를 바라보던 눈빛은 공허함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지금 staire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저 쥐의 눈빛은..
staire는 슬그머니 일어나 철망을 열고 쥐를 꺼냈다. 틀림없이 살아남을 녀석이다.
쥐를 가운 주머니에 넣고 창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녀석을 창밖의 뜰에 내려놓았다. 쥐는 비틀거리면서도 풀숲을 헤치고 기어간다...
봄볕이 내려쬐는 창틀에 턱을 괴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뒷모습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누군가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KGB였다.
"쉬잇..."
KGB는 뭐라고 말하려는 staire를 제지했다. 그리고 쥐가 사라진 풀숲 그늘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자네인가... 난 본과 1학년 때 실험실에서 도망친 쥐를 발견한 적이 있지. 너무 귀여워서 집에 데려다 길렀지만 며칠
못 가 죽고 말았어. 1년이 지난 후에야 그게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았지. 그리고 마치 자네처럼 나도 한 마리를 살려주었어.
벌써 4년 전 일이야... 내가 도망시켜 준 그 쥐가 어느 마음씨 고운 사람을 만나기를 빌었더랬어. 그리고 나서 그 일은 까맣게
잊었지. 살벌한 의대 생활 속에서 그때의 쥐에 대한 기억을 잊고 냉정하게 살아왔는데... 아직도 의대생들은 내 어릴 적의
모습들을 간직하고 있군..."
그럼 그 쥐를 발견한 사람도 실험 때 다른 쥐를 살려 주었고 또 그 쥐를 만난 사람, 또 그 다음 쥐... 그렇게 오늘까지
계속되어 온 것일까? 아니, 그럼 KGB가 만났던 쥐를 도망시킨 사람은 또 누구였을까?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일이었을까?
물론 실험 규정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며 도망시킨다 해서 쥐에게 무슨 대단한 것을 베푸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가끔 의대를 들를 때면 실습실 앞의 작지만 화사한 뜰을 거닐 때가 있다.
어디선가 귀여운 흰 쥐 한 마리가 기어나올 듯한 착각에 빠져...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22일(수) 21시58분49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20 : 10억짜리 신랑감
나뭇가지 아래, 빵 한 덩이
포도주 한 병, 시집, 그리고 그대...
- 오마르 카이얌, '루바이야트'에서
본과 2학년 때였다. 부산에서 서둘러 올라오신 어머니께서 갑자기 선을 보라는 거다. 아니, 이 젊은 나이에 무슨... 하며 펄쩍 뛰는 staire에게 이모들까지 합세해서...
사연인즉, 어느 집에서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와 딸 둘, 이렇게 여자들 셋만 남았는데 남자가 하나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왜 하필 저를?"
"하필이라니... 잘 아는 집이니까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사실 그 나이 때의 젊은 애들 치고 맞선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을 갖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staire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긴 하다.)
그런데 나중에 듣기로는 거기엔 14억이라는 돈이 걸려 있었던 거다. 돌아가신 분은 유산을 동산으로만 14억을 남기신 거다.
부동산은 빼고... 그리고 유언장이 참 단순했다. 큰딸과 결혼하는 사위에게(큰딸에게...가 아니다) 10억과 부동산 전부를,
작은 사위에겐 4억을 남기신 거다. 물론 어머니를 모시는 건 맏사위.
이제는 단순히 맞선에 대한 거부감의 차원이 아니다. 도대체 이런 조건으로 사위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도 당혹스러운데 왜 staire가...?
어쨌든 맞선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내가 과연 억대 신랑감인가 하는 의문을 덮어둔 채 약속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제가 언제 큰딸하고 결혼한댔어요?"
"왜? 큰딸도 너하고 같은 나이잖아... "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기왕 만나는 거 둘다 만나야지 왜 큰딸 쪽으로 몰고
가시는 거냐구요."
"그랬나? 하여간 일단 큰딸부터 만나보고..."
이건 뭔가 잘못된거야. 10억이 얼마나 큰 돈인지 모르지만... 어머니께선 그냥 들어온 혼담이니까... 하시는 정도였지만 이모들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예민했다.
무조건 큰딸을 택해야 한다는거다. 4억도 큰돈이지만 4억을 갖고 3년을 기다려봐라. 10억이 되나. 여자 나이 3년 차이는 3년 지나면 그게 그거야... 이모들의 말씀을 듣고서야 자매의 나이 차가 3년이라는 걸 알았다.
친구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야, 네가 설마 돈 몇억에 아쉬운 인생이겠냐. 젊은 여자를 택하는 게 백번 나아. 나이를 어떻게 돈 주고 사냐?"
이런... 결국 그게 그거다. 도대체 돈 몇억과 여자의 젊음... 이런 게 만나보기도 전에 단정지을 수 있는 대단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맞선'은 결국 맞선이 아닌 미팅처럼 돼버렸다. staire가 끝까지 고집을 부려 언니와 동생을 한꺼번에 만난 거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어른들께서 자리를 피하셨다...
"죄송해요. 제가 좀 서툴러서... 사실 전 이런 자리에 나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러시겠죠. 우리도 그런 걸요."
언니는 대학 4학년. 동생은 1학년. 둘다 맞선 같은 걸 보고 다니기엔 젊다.
14억...이란 요소를 배제하고 보면 상냥하고 소박해보이는, 사실 누구와 결혼해도 후회할 것같지 않은 좋은 아가씨들이었다. 세
사람은 점차 편안하게 어울리기 시작했고 아가씨들의 어머니께서 주문해 둔 와인을 맛보며 실속없는(?) 음악과 시, 연극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정말 우리 둘 중 하나와 결혼하실 생각이 있는 거에요?"
언니 쪽에서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한 얘기를 꺼냈다.
"글쎄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얘기할 만한 게 아닌 것같죠?"
"그래요... 우리도 사실 오늘 저녁, 즐겁게 보낼 생각 뿐이지 어른들처럼 신랑감을 보러 온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하하... 그리고 둘 중 한 분을 택하기로 하면 나머지 한 분께 미안해서 어떡합니까. 남도 아니고..."
"혹시 10억과 4억에 대한 얘기 들으셨어요?"
"예... 재미있는 얘기더군요."
"우리도 그래요. 남의 일처럼 재미있기만 해요."
"전 10억이든 4억이든 생기면 의대 당장 그만두고 하고싶은 거 할 생각입니다. 아마 어른들께서 이런 생각을 아시면 혼담이고 뭐고 다 끝나는 거겠죠. 제가 의대생이 아니었으면 이런 얘기가 나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맞아요. 어머닌 그돈으로 병원이나 하나 짓고... 그렇게 생각하시거든요."
"그럼 어머니께 그렇게 전해주시겠습니까? staire는 뭘로 먹고 살 지 모르지만 적어도 의사가 되지는 않을 거라구요..."
"그럴께요. 다시 만나더라도 이런 자리에서는 아니었으면 해요."
그 자매들과는 그 후로도 가끔 만났고 꽤 오래 사귀었다. 물론 늘 셋이서... 혼담은 당연히 깨어졌고 이모들의 실망은 컸다. 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어...'하고 웃으며 넘어가셨지만...
이제 그 자매는 10억과 4억의 주인을 만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돈이 아깝지 않은건 아니지만... 좀더 자연스러운 자리에서 만났으면 뭔가 이루어질 듯도 한 멋진 아가씨들이었는데...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23일(목) 00시52분06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21 : '86 합창단 연주회
Dilettante가 활개치고 다닌다.
Amateur가 나돌아 다닌다.
이 땅에 심미주의자의 목소리까지 들리니
우리들에게 파국이 다가왔다.
- J. M. Whistler (미국의 화가. 1834 - 1903)
1986년 2월, 개강 직전이었다. 친구 승태의 전화를 받은 staire는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네가 금년에 지휘를 해야 한다는 거야."
이게 웬 날벼락...
staire는 본과 1학년을 보내며 도저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둘다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둘다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고 연주회 시기도 비슷해서 연습 날짜가 수시로 겹치는거다. 결국 staire는 합창단은 포기하고
오케스트라(SNUMO)에 전념하기로 결심했고 합창단 단장을 맡은 승태에게도 이미 그렇게 얘기한 뒤였다. 그런데 갑자기 합창
지휘를 하라니...
다음날 승태를 만나 얘기를 들었다. 상황이 심각하긴 했다.원래 합창단은 지휘자가 둘이다. 정지휘자는 본3, 부지휘자는 본2.
그런데 정지휘자로 내정된 형이 갑자기 합창단을 떠난 거다. 혼자 남겨진 부지휘자 석재로선 혼자 연주회를 끌고 나갈 수 없다며
지휘자 하나를 더 구해야 한다는 얘기... 우리 학년 애들 중 승태는 단장, 민호는 반주, 기웅이는 테너 솔로... 지휘를 맡길
사람이 없었던거다.
그나저나... 무슨 뛰어난 실력이 있어 지휘자로 추대된 것도 아니고 보니 준비가 돼 있을 리가 없다. 원래 연주회 준비는
겨울방학때 시작된다. 선곡, 악보 입수, 공연장 섭외... 모든 일이 이미 끝나 있어야 할 시기에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당장 첫 주 연습에서 할 게 없는 한심한 상태였다.
문제는 또 있다. 군기가 엄하기로 유명한 SNUMO에서 이 일을 용납할 것인가 하는 문제. 이미 staire는 SNUMO에만
충성(?)하기로 선배들께 약속했는데... 우선 악장형을 만나 사정을 설명하고 '합창 지휘를 이유로 오케스트라 연습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허락을 받았다. 글쎄... 지휘자라는 녀석이 다른 서클에서 이런 약속을 했다는 걸 알면 합창단
쪽에선 뭐라고 할까...
게다가 집에는 또 뭐라고 설명하나... 어머니께 합창단은 그만두겠다고 이미 말씀드렸는데... staire가 기회만 생기면 의대를 떠나려 하는 걸 잘 아는 부모님들의 입장에선 합창 지휘라는 게 달가울 리가 없는 것일 텐데...
어쨌든 일은 벌어졌다. 3월, 4월에 부지런히 음대 도서관을 뒤지고 다른 대학 합창단을 찾아다니며 선곡을 하고 악보를 구했다.
사실 전부터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오페라의 합창... 언젠가 합창 지휘를 하게 되면 그걸 꼭 해보고 싶었던 거다.
staire가 제일 좋아하는 레온카발로의 'Pagliacci'에 나오는 '종의 합창' 악보를 구했다. 그러나 결론은... 대학
합창단이 건드리기엔 너무 섬세하다...
좋은 합창곡이 많기로는 마스카니의 'Cavalleria Rusticana' 제 1장도 빼놓을 수 없다. 개막과 동시에 시작되는
'아침 기도',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라는 유명한 곡이다. 그 다음에는 멋진 남성 합창 'Il cavallo
scalpita(말들은 뛰놀고)'가 이어진다. 그리고 온 마을 사람들이 부활절 미사를 위해 성당으로 가면서 부르는 'Regina
coeli...' 이 부분은 제 1장의 절정이다. 제일 욕심나는 곡은 사실 세 번째 곡이다. 하지만... 합창단 2개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중간 이후에 나오는 주인공 산투짜의 솔로 부분(Inneggiamo, il signor non e
morto...)을 감당할 만한 소프라노가 없다...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부분인데...결국 '아침 기도'로 낙착을
보았고...
평년의 규모로 일을 벌이기에는 시간도 인력도 부족했다. 상당히 축소된 규모의 연주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남성 합창, 여성
합창은 없어졌고 staire가 맡은 것은 한국 가곡, 오페라 합창, 대중음악의 세 부분, 석재는 흑인 영가와 미사.(어쨌든
석재는 내년에 또 지휘를 해야 할테니... 정지휘자는 staire였던 셈이다.)
포스터를 제작할 때쯤 해서 갑자기 staire에게는 걱정거리 하나가 늘었다. 서울 시내곳곳에 나붙을 포스터에 내 이름이 찍히면
동생이나 이모들이 볼 게 틀림없고 (그때 동생은 경희대 합창단의 반주자였다.) 부산에 계시는 어머니의 귀에 staire가 지휘를
한다는 소식이 들어가면 마음이 편하실 리가 없으니... 그래서 승태에게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고 나선 것이다.
"뭐? 포스터와 프로그램에 네 이름을 빼 달라고? 그게 말이 되냐?"
물론... 지휘자 이름이 없는 연주회 포스터... 말이 안되는 줄은 안다.
"하지만 석재 이름은 실을 수 있으니까..."
"두 section 맡은 석재 이름만 넣고 세개를 맡은 너는 없고... 그게 뭐니?"
"알아... 말이 안되는 거... 하지만 난 도저히 내 이름이 찍힌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는 걸 감당할 수 없어..."
승태도 staire가 그런 요구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쨌든 연주회가 두 달도 안남은 상황에 지휘자를 바꿀 수도 없고... 결국 포스터와 프로그램은 staire가 빠진 상태로 제작되었다.
"넌 결국 후회할거다. 네가 지휘를 했다는 기록은 아무데도 남지 않을거야."
하지만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거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것...
연주회가 다가오는데도 연습은 지지부진... staire가 의대 오케스트라 연습에 가는 날이면 석재 혼자 연습을 시켰고 여름방학
내내 staire는 미처 구하지 못한 악보를 찾아 이리저리 뛰었다. 여름 캠프도 오케스트라와 겹치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아마 합창단 역사에 여름 캠프에 안 간 지휘자는 staire밖에 없을 거다. 'My fairlady'에 나오는 합창곡 'Get
me to the church on time'은 반주 악보가 없어 음반을 들으며 채보하여 피아노 악보를 그리는 등 악전고투의
연속...
드디어 연주회 일주일 전이 되었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 같은 건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저 무사히 끝낼 수만 있다면...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재난이 staire와 합창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86년에 대학을 다닌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86 Asian games(여기 s를 꼭 붙여야 하나?) 직전에 전국의 대학들이 기습적으로 휴교를 한 일이 있다. 소위 'Asian 방학'.
사실 그 전날 의대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있었다. 임헌정 선생님의 지휘로 'Peer Gynt'를 연주했던 기억에 오래 남을
연주회... 그리고 연주회날 밤 after는 모처럼 MT를 겸해 마석으로 떠난 것이다. 밤새 놀고 아침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더니...
교문 앞 게시판에 휴교 공고가 붙어 있는 것이다. 이거 야단났다. 학교가 문을 닫으면 남은 일주일간 연습은 어디서 하나? 그리고 학교에 애들이 나오지 않으면 청중 동원은 또 무슨 수로?
일이 악화되느라고 그 다음날엔 김포 공항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
북한측에서 한 것인지 뭔지 모르지만 연주회를 열기에는 최악의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쨌든 벌인 일이니 마무리는 해야 한다... 가까운 교회를 빌려 연습을 하기로 했다. 연주회장인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연주 취소를 종용하는 전화라도 날아올까봐 전전긍긍하는 사이 일주일이 지나고 연주회 날이 되었다.
리허설을 마치고 연주회까지는 앞으로 30-40분, 석재와 staire는 가까운 카페에서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한잔씩...
"힘내..."
"그래... 너도..."
단원들이 무대에 정렬하고 조명이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 첫 section을 시작하기 위해 staire와 반주자
자경이(간호학과)가 무대로 나갔다. 연주회장을 울리는 박수소리... 다행히 청중들이 연주회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박수 소리가 가라앉으며 들리는 객석의 웅성거림. 지휘자가 '이석재'가 아님을 알아챈 청중들의 어리둥절한 표정...
어쨌든 청중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자경이는 피아노 앞으로 갔다. 단원들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걸 과연 미소라고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앨토의 서정이(본1)가 나중에 그랬다.
"오빠는 시작하기 전에 묘한 표정을 지으셨어요..."
왼손을 들어 자경이에게 가볍게 신호를 보냈고 자경이의 피아노 소리가 잔잔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물결처럼 흐르는 8분음표... 김규환의 '물새'가 시작되었다...
음악 속에서 staire는 차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두번째 section, 오페라 합창. 첫곡은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짧은 합창 'Giovani lieti,
fiori spargete', 워낙 짧아 잘 연주되지 않는 곡이지만 무척 귀여운 곡. 가장 모짜르트다운 합창이 아닐까 싶다.
두번째는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에 나오는 짤막하고 가벼운 폴카. 개성적인 반주 음형과 활달한 리듬...
가벼운 것 두 개를 해치우고 단원들의 긴장이 풀렸다. 이제 어려운 것들이다.
마스카니의 '아침 기도'. 자경이는 좀 까다로운 반주 때문에 무척 고생이 많았지...
단원들의 긴장이 풀리는 것이 반비례해서 staire는 점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땀이 비오듯 흐르기 시작하고... 이겨낼 수 있을까? 긴장감으로 터져버릴 것같다.
마침내 마지막 합창. 바그너의 탄호이저에 나오는 '순례자의 합창'. 객석의 잡음 때문에 조금 시간을 끌었다. 이윽고 쥐죽은 듯
고요해지자... 무반주의 첫 부분이 시작되었다. 'Begruessen...' 가사를 잊어먹었다. 지휘자가 그까짓 가사를 잊는 게
뭐 대단하냐고 생각하겠지만... 합창 지휘자는 모든 성부의 악보를 암기하고 있어야 하고 가사까지 알고 있어야 하는 거다.
단원들이 가사를 잊었을 경우 지휘자의 입을 보며 기억을 되살려야 하는데... 다행히 단원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중간에 잠시
반주가 나왔을 때 고맙게도 음이 거의 떨어지지 않은 걸 알았다. 무반주 부분과 반주 붙은 부분이 반복되는 곡의 경우 무반주
부분에서 음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결과는 치명적이다. 특히 이 곡처럼 섬세한 곡에선... 다시 무반주 부분. 바그너답게반음계가
얽히는 까다로운 대목이다. 연습할 때 staire를 꽤나 고생시킨... 이것도 무난히 넘어갔다. 이제 반주가 슬슬 들어오는
마지막 부분... 자경이 쪽을 슬쩍 보았다. 자경이는 그 짧은 순간에 미소를 지어 주었다...
마침내 연주가 끝났다. 그리고 staire의 합창단 생활도... 지휘를 하며 소프라노와 테너를 연습시키느라 원래 high
tenor였던 staire는 목소리를 망치고 말았다. 하긴 꾀꼬리같은 목소리는 아니었으니 아까울 건 없다. (staire를
아시는 분은 아직도 staire의 목이 온전하지 않은 걸 아실 테지요...) 로비에서 만난 사람들은 staire를 보고
몰려들었다.
"너, 어떻게 된거야. 지휘자가 이름도 감추고..."
staire는 미소로 대답하고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After 장소인 대학로의 'Time'을 향해...
쌓인 피로가 밀려와 그곳에서 금방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은경이가 프로그램 하나를 건네 준다. 프로그램에는
백지가 하나 끼어 있다. 밤새 애들이 Rolling paper를 돌린 거겠지. 펼쳐 보니 단원들이 한 마디씩 적은 글들이 한눈에
밀려들었다.
'악조건 속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신 형의 모습을 보며...'
이건 용진이.
'너의 편안하게 잠자는 모습이 많은 걸 이야기해주더군. 그렇지만 우리도 너때문에 두 배로 힘들었음을 알아 주겠지?'
요건 승태.
'그동안 아빠를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어요...'
둘째 딸 정수의 긴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오빠. 저는 사랑을 하며 살고 싶습니다.'
평소와 다름 없는 지영이의 글.
한 모퉁이에 있는 서정이의 예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오빠와 노래할 때는 힘이 납니다.
그리고 오빠의 투철한(?) 책임감과
자기 통제가 가끔씩 느껴집니다.
그게 오빠겠지요. 하지만 힘들어요.
건강하세요...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길 빌어요...'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끝)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8월15일(월) 21시45분14초 KDT
제 목(Title): 서울역에서 만난 전경
적어도 증오의 감정은 순수해. 오도되기 쉽고 때묻기 쉬운 '사랑'이라는 애매한 개념보다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훨씬 투명하게 보여주는 게 증오라는 거지...
- 87년 6월, 어느 서클 회지에서
학교는 휴교 상태였지만 우리는 매일 모여서 끝없는 토론으로 시간을 보냈다.
전두환의 호헌 선언 이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87년, staire의 본과 3학년 시절은 그렇게 얼룩지고 있었다.
"폭력을 반대한다구요? 물리력과 폭력은 다릅니다. 선생님의 사랑의 매를 당신은 폭력이라고 부릅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폭력이 아닌지 석연히 구별해낼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것은 증오입니다. 저변에 증오의 감정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물리력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무력 투쟁이
증오에 좌우되는 맹목적인 폭력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증오감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거리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재철이의 열띤 목소리에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무력 시위에 대해 시큰둥한 표정들이었다. 그보다는 어느 진료 서클의 회장인 상준이의 주장이 훨씬 매력적으로 들렸다.
"흰 가운을 입고 나가는 겁니다. 시민과 학생, 전경 구별 없이 부상자들을 치료해줄 수 있는 중립 지대를 우리가 만드는 거에요. 지금 분위기는 너무 뜨거워요. 식힐 필요가 있습니다..."
투표를 거쳐 진료 봉사쪽으로 대세가 기울었고 우리는 조를 짜서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흰 깃발과 흰 가운... 서울 의대 본과생들로 이루어진 의료 봉사단은 시내 곳곳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의료 봉사래야 간단한 응급
처치 수준이었지만 우리가 깃발을 세우고 테이블을 벌여놓은 것만으로도 그럴듯한 중립지대가 형성되었다. 학생이건 전경이건 우리
앞에서는 양처럼 온순했고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거리에 내던져진 젊음과 자신의 뜻에
무관하게 소모되어가는 젊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순수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
최루 가스에 눈물을 흘리고 초여름의 따가운 볕에 그을리면서도 우리는 쉴 틈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찾는 사람은 점점 더 불어났고 모자라는 약품을 대기 위해 이리저리 뛰는 여학생들의 발길은 더욱 바빠졌다.
staire가 있던 곳은 서울역 광장. 본격적인 충돌이 한 번 있은 뒤여서인지 우리로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환자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고 간단한 응급처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이들을 실어나르는 정호와 윤호의 차 시트에는 핏물이 배어들고 있었다. 눈을 다쳐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는 여학생을 부축해 온 어느 청년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며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증오감의 유무로 판단한다는 건 불가능해. 저 분노에 타오르는 눈빛을 보면...거리에 나선 이상 자신의 감정마저도 스스로의 것이
아니야. 여기엔 전염병처럼 증오의 씨가 뿌려지고 있는 거야. 비폭력 투쟁이란 간디와 같이 느긋한 성인 군자들에게나
가능한거야...'
한 차례 파도가 쓸고 지나간 뒤 우리는 숨을 돌렸다. 다행히 전경들도 진료 봉사단의 영역을 인정해주었고 우리 팀중에 다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간호학과 여학생 하나가 일사병으로 쓰러져 집으로 보내어진 것을 제외하면...
따가운 눈 주위를 찜질용 얼음으로 비비며 잠시 쉬고 있던 우리는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긴장했다. 한 무리의 시민들이 우리 쪽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백골단이다!"
그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특별히 성격이 비뚤어진 자들로 구성된다는 냉혈 집단이 우리를 향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떡하지? 일단 물러날까? 저녀석들이 우리라고 해서 그냥 놔두진 않겠지?"
"하지만... 쟤들도 인간인데 설마... 그리고 이 약들과 의료 장비... 이걸 버리고 간다는 건..."
"안돼. 우리에겐 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비도 없잖아. 맨손으로 저녀석들 앞에서 버틸 수는..."
말을 맺을 틈이 없었다. 백골단의 짧은 곤봉에 진태가 머리를 호되게 맞고 쓰러지는 것을 신호로 우리는 역 오른편의 골목길을 향해
뛰었다. 그들은 약병과 붕대를 늘어놓은 테이블을 뒤엎고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흘낏 돌아본 눈에 비친 광경은 치료를 받고 얼음
주머니를 얼굴에 대고 있던 어떤 청년을 방패(백골단 특유의 작고각이 진)로 내리찍는 모습...
그때 staire의 가슴을 꿰뚫은 감정은 분명 증오감이었다. 손에 기관총이라도 들고 있었다면 앞뒤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쏘아붙였을 정도로 맹목적인 증오...
학생 전투대의 반격으로 백골단의 기세는 좀 누그러졌지만 진료 봉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일도 이 자리에서 진료 봉사를 하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운은 달아나기에는 무척 거추장스러운 옷이다. 어느 가게집으로 뛰어들어간 staire와 한석이, 민규는 친절한 가게 아주머니에게서 물을 얻어 마시며 숨을 돌렸다.
"아무래도... 문을 닫아야겠어. 학생들은 어떻게 할거야?"
"죄송합니다만... 당분간 나가기 어렵겠군요. 잠시 신세를 져도 될까요?"
아주머니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닫으러 나가셨다. 그때 구르다시피하며 뛰어들어온 사람은... 헬멧과 방패를 잃어버리고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청바지와 청조끼를 입은 백골단 녀석이었다. 곤봉을 쥐고 있는 손에도 힘이 없어보였다. 그는 가운차림의 우리를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겁먹은 눈... 전쟁을 겪은 일은 없지만 전쟁터에서 느끼는 광기라는 것은 이런 걸까... 대열에서
낙오된 병사의 왜소한 모습이란...
"아주머니, 얼음하고 붕대 좀 구할 수 있을까요?"
"붕대는 내 가운 주머니에 몇 개 있어..."
우리는 그의 터진 머리를 씻어내고 항생제 연고를 대충 바른 후 그의 머리를 싸매어 주었다.
"백골단은 싸움에 나서기 전에 술을 마시거나 흥분제를 먹는다던데... 정말이에요?"
그는 대답 없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식아! 니네 대장이 그렇게 시켰니? 우린 그렇다 치더라도 부상자를 그렇게 두들겨패는 법이 어딨어!"
"......"
다혈질인 한석이의 화난 목소리에도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가게에 딸린 살림방 들창으로 밖을 내다보시던 아주머니는 우리를 보고 말씀하셨다.
"이제 조용해진 것같아. 학생들, 이제 나가도 되겠는데..."
"아주머니, 실례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아주머니가 안내하시는 대로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맨 끝에는 그 백골단 청년이 말없이 따라나왔다.
"헤어지는 마당인데... 악수나 합시다.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래야겠지요..."
민규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
그는 고집스럽게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민규가 어색하게 돌아서는 순간...
"민규야!"
"안돼!"
staire와 한석이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 백골단 청년이 등을 보이고 돌아서는
민규의 뒷머리를 곤봉으로 힘껏 내려친 거다.
"야 이 개새끼야!"
한석이가 길바닥에 구르는 돌을 집어 힘껏 던졌으나 돌은 달아나는 그에게서 한참
빗나가 어느 담벼락을 때렸다.
staire는 민규를 안아 일으켰다. 눈이 풀린 민규의 뒷머리는 무섭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핏발이 선 눈으로 씩씩거리는 한석이,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늘어져 있는 민규를 번갈아 보며 staire는 다시 속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우리가 피해야 한다는 폭력, 버려야 한다는 증오...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인가...'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9월22일(목) 23시46분07초 KDT
제 목(Title): 사랑스러운 아내
'사랑하는 엘라 제인, 아내이자 생애의 벗, 여기에 잠들다. 50년의 행복을 진심으로 감사하노라...'
...
"50년이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50년? 음... 글쎄, 휴일을 빼고 150학기라는 셈이 되는데... 너무 길어서 실감이 안 나는 걸?"
"넌 날 그처럼 오래 사랑할 수 있어?"
- Alan Parker, '작은 사랑의 멜로디'
"자궁경부암... 이놈은 약물 치료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죠.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아요. 방 군이 얘기하겠나?"
김노경 교수님은 유학을 마치고 갓 귀국하신 방영주 교수님을 지목하셨다.
"그렇습니다. 자궁경부암은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 이외의 방법은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cisplatin이 나온 이후로는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cisplatin은 백금 제제로서 독성이 좀 강한 것이 흠이지만 제가 갖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따분한 종양학(oncology) conference... staire는 필기에 여념이 없었다. 'cisplatin, SE! but pot. in UCC...'
시스플라틴, 부작용(Side Effect) 심하지만 자궁경부암(Uterine Cervix Cancer)에 효과가 있음... 이런 뜻이다.
교수님께서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가시는 '부작용'이란 게 어느 정도이길래 심하다고 하시는 걸까... 항암제 치고 약간의 부작용이 없는 경우는 없는데...
항암제란 기본적으로 세포를 죽이는... 그러니까 독성이 강할 수밖에 없는 약이다.
하지만 아무 세포나 덮어놓고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니까... 항암제는 주로 분열기의 세포를 공격한다. 암세포는 활발하게 분열하는 놈이니까 항암제에 가장 심하게 피해를 입는다.
그렇지만 우리 몸에서 암세포만 분열하는 건 아니다. 암세포이든 아니든 분열을 많이 하는 세포는 모두 피해를 입는다. 예를 들어
피부, 장점막, 머리카락, 골수, 생식 세포... 그래서 항암제 치료를 오래 받은 환자는 예외 없이 피부가 거칠어지고 머리가
빠지고 피를 토하는 등 부작용에 시달린다.
81 병동의 주치의(레지던트)들은 환자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한 차트를 대충 읽고 staire에게 휙 던진다.
"젠장... 우리 병동은 무슨 시체 처리장인가... 왜 죽을 때가 되면 보내는거야..."
차트는 정말 처참하다. 자궁경부암으로 수술을 받았으나 재발, 암세포가 간과 위장, 폐, 그리고 최근에 뇌까지 침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정도라면 치료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항암제(방영주 교수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신 cisplatin)와
방사선 치료를 5년째 받고 있는 중... 통원치료하다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응급실을 거쳐 입원... 그리고 두툼하게 쌓인 각종
검사 자료...
'죽으러 왔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다.
잠시 후... 환자용 엘리베이터 쪽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스트레처에 실려 등장한 주인공(?) 성희순씨... 부스럼이 가득한 피부에
깨끗이 빠져버린 머리...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 전형적인 말기 암환자의 모습이다. 두 명의 간호사와 40대 중반 정도
되어보이는 보호자와 함께 81 병동으로 들어왔다.
성희순씨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한구석에 누워 있을 뿐.
staire나 다른 실습생들도 '배울 것 없는' 환자에게 접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아침 수업을 마치고 9시반쯤 병동에 올라갔더니 김노경 교수님과 방영주 교수님이 와 계시다. 주치의 성욱이형이 장갑을
벗으며 주사기에 든 것을 비닐 주머니에 옮겨 담고 있다. 아마 liver biopsy(조직 검사를 위해 굵은 바늘로 간조직을
떼어내는...)를 막 끝낸 듯하다. 환자는 고통스러운 듯 끙끙 앓고 있다.
늘 환자 곁을 떠나지 않는 보호자가 환자를 안고 쓰다듬어주며 위로하고 있었다.
"잘 참았어. 많이 아프지?"
말기 암환자의 고통이란 워낙 심해서 그까짓(?) biopsy가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겠지만... 저 아저씨는 무척이나 다정다감하군...
그런데... 이건 좀 의외다. 환자는 거의 해골같은 모습을 한 할머니인데 40대의 젊은 남자가 잘 참았어... 라니? 저 사람은 환자와 어떤 관계일까?
차트를 다시 읽어보고 깨달은 사실은... 환자 성희순씨는 40대 초반의 젊은 환자.
항암 치료의 부작용으로 흉악한 몰골이지만 실제 나이로는 보호자와 부부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병동이 조용해진 후 그분 곁에 가서 물어보았다.
"성희순씨 남편 되시죠?"
"그래요. 그렇게 안 보이시죠?"
그분은 빙긋이 웃으시며 부스럼과 허연 살비듬에 뒤덮인 환자의 머리와 이마에 뺨을 비비고 입을 맞추는 등 환자를 다독거리기에 바쁘다.
인턴이 정맥 주사를 하러 들어온 사이 그분과 staire는 병실을 나와 계단으로 갔다.
거기라면 눈치 안 보고 담배를 피울 수 있다.
"집사람이 너무 늙어 보여서 그러시는 거죠? 하긴... 그럴 만도 해요..."
"간호하시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어요."
"하하... 보기 좋았나? 집사람이 좀더 이쁘게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
staire의 가슴 속을 빙빙 돌고 있는 의문... 그분은 저런 몰골의 부인을 간호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무리 정이 들 대로 든 사이라지만 정말 기쁘게 간호하고 있는 것일까?
"부인을 여전히 사랑하세요?"
그분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뿜는다.
"왜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음... 이래서야 질문을 한 staire가 무안해지고 말았다.
"지금 저런 모습을 하고 있어도 여전히 그런 감정을 갖고 계신 거에요?"
다시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는 그분의 옆모습... 괜한 질문을 한 건 아닐까...
그 짧은 시간 동안 staire는 그분의 대답을 이것저것 짐작해 보았다.
'오랜 세월 살다 보니 정이 들어서...'
'그동안 저때문에 고생했는데... 미안해서라도...'
'저마저도 외면하면 누가 돌봐주겠어요? 저 불쌍한 사람을...'
그러나 그분의 대답은 staire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맛있게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연기를 뿜으며 staire를 돌아보는 그분의 눈빛은 마치 10대의 소년처럼 생기가 돌고 있었다. 약간 짓궂어 보일 정도로...
"강선생은 모를 거요... 저 사람이 처녀때 얼마나 이뻤는지..."
옛날을 회상하는 듯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그늘 없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05월01일(월) 02시48분35초 KST
제 목(Title): 전신 화상
* 이 글은 1995년 4월의 대구 가스 폭발 사건을 즈음하여 씌어졌습니다. *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 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 전태일, 1970년 8월 9일자 일기에서
인권 변호사 조영래씨가 이름을 감추고 낸 '전태일 평전'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도 전신 화상에 대한 남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대구에서 전해지는 몸서리쳐지는 소식들... 정치권과 언론의 치졸한 반응이야 넉넉히 예상했던 것이지만 그보다 더 깊이 내 가슴을
때리는 것은 '불에 탄 시체'라는 대목이다. 그 수많은 '중상자'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전신 화상 환자들...
일반외과 실습을 위해 파견 나갔던 어느 병원, 구로 공단에서 실려 온 전신 화상환자가 staire보다 한 발 먼저 도착해 있었다. 무표정하게 씌어진 일반외과 교과서의 화상 부분을 대충 읽고서 병실에 들어갔다.
얼굴과 가슴, 배 일부 이외의 거의 전신에 뜨거운 물(보일러에서 터져나온 100도가 넘는 가압수)을 뒤집어쓴 환자는 안타깝게도 의식을 잃지 않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단내가 나는 그의 입김을 쐬어가며 vital sign(호흡수, 맥박수, 혈압, 체온)을 재고 그의 너덜너덜한 피부를 이잡듯
뒤지며 바늘 꽂을 데를 찾았으나 도저히 찌를 곳이 보이지 않는다. 혈압대를 감을 곳이 없어 혈압 란은 비워 두고서...
결국은 금기로 되어 있는 경정맥(jugular vein)에 바늘을 꽂아야 했다. 화상 치료는 체액 균형을 맞추기 위한 수액 공급으로 시작되는 관계로...
전신 3도 화상의 참상은 어깨에 너덜거리는, 떼어내다 남은 작업복 조각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워카처럼 생긴 작업용 구두를 벗기다 묻어나온 살점 쯤은 관심 밖이다. 그보다 훨씬 더 처참한 과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화상 치료의 가장 힘들고도 고통스러운 부분은 환자를 '닦아주는' 것이다.
(경고 :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여기에서 q를 누르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농담이 아니에요.)
화상의 고약한 점은 그것이 아물어도 흉하게 일그러진 흉터가 남는다는 점에 있다.
손상을 입은 피부가 재생되는 과정에서 콜라젠 섬유가 제멋대로 꼬이며 흉측한 모습을 남기는 거다. 그거야 미관상의 문제 아니냐고?
소규모의 화상일 때는 물론 외관상의 문제로 끝난다. 그러나 전신 화상의 경우에는... 재생되어가는 콜라젠 섬유가 이리저리 꼬이고
수축하면서 관절을 죄는 것이다. 이대로 방치하면 완치된 후에도 관절을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혈관을
죄어붙여 자칫하면 팔다리를 잘라야 하는 사태에 이른다. (이따위로 인간을 만든 조물주의 심술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우기 화상을 입어 흐물흐물해진 피하조직은 세균이 번식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밥'이다. 가뜩이나 화상에 따르는 스트레스로 면역
기능마저 정상이 아닌 환자에게 이것은 치명적이다.
그렇다면 그 해결책은...
하루에 한 번 또는 두 번, 화상 부위를 닦아주는 거다. 항생제와 링거 액에 적신 거즈를 손에 둘둘 말아서... 말이 좋아서
'닦아주는' 것이지 이건 '벗겨낸다'는 표현이 오히려 적합하다. 한 번 문지를 때마다 한 무더기씩 사람의 살인지 쓰레기통에서
흘러나온 썩은 고기인지 모를 지저분한 것이 거즈에 묻어난다.
지저분한 것쯤이야 참을 수 있다. 의사가 그런 것을 꺼린대서야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귀가 멍해지도록 목청껏 질러대는 비명... 이건 고문이다. 팔다리를 가죽끈에 묶인 채 침대에 고정된 환자의 고통에
감히 비할 바 아니지만 이런 환자를 닦아야 하는 고통 역시 인내의 한계를 넘나든다. 환자가 애처롭다고 해서 슬슬 닦아서 될 일도
아니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은 무자비하게, 눈 딱 감고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말끔히 해치우는 것뿐이다.
어지간한 staire도 여기엔 두 손 들고 말았다. 손바닥 아래에서 환자의 갈비뼈가 부러져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CPR(Cardio Pulmonary Resuscitation : 심폐소생술)을 하던 staire였지만...
TV에서 흘러나오는, 격앙된 앵커의 음성으로 듣는 '중상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staire의 귓전을 울리는 8년 전의 그
비명소리, 선연히 떠오르는 그의 일그러진 얼굴과 비끄러맨 가죽끈이 끊어져라 당기며 온 몸을 뒤틀던 그의 몸짓 하나하나...
8년 전의 그때도 그랬다. 이런 살인적인 환경에 근로자를 방치하는 사업주와 정부에 대한 분노 이전에 한 개인이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이 staire의 단순한 머리속을 뒤덮었던 것처럼 오늘 뉴스를 보면서 어쩌면 수많은 시청자들에게는 그냥 무표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 '중상자'라는 말에서 그 숱한 화상 환자들이 보내고 있을 고통스러운 밤이 떠오르는 거다. 불 속에 내던져진 전태일 열사의
순결한 영혼과 어느 불행한 노동자의 비명, 그리고 오늘도 참아서 해결될 수 없는 고통으로 지샐 대구의 부상자들, 이 모든 것이
한데 얽혀 동물적이라 해도 좋을 분노가 되어 끓어 오르는 거다.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는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08월03일(목) 22시14분19초 KDT
제 목(Title): Sexual identity (절대로 야한 거 아님!!!)
꽃(la fleur)이란 말이 여성명사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 가스똥 바슐라르
배율을 1500배로 올리자 시야는 흐릿해진다. 렌즈의 해상도가 감당하기 힘든 고배율 아래의 뽀얀 세계. 그 속에 쓰러져 죽은 커다란(그래봐야 10 마이크론 정도지만)
백혈구 한 마리.
"보이지?"
"예..."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neutrophilic myeloblast같은데요..."
김상인 교수님과 staire는 같은 슬라이드를 보고 있다. 슬라이드 하나에 접안 렌즈 여러 벌이 달린 교육용 현미경.
진단은 이미 알고 있다. 항암제로 한 번 실패한 AML(Acute Myelocytic Leukemia : 급성 골수성 백혈병).
"골수 이식 수술을 할 예정이지? 골수 제공자는 환자의 누나...맞나?"
"예..."
"그렇다면 백혈구의 핵을 자세히 봐 두게...
"???"
1500배로 확대된 핵은 교과서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세 토막으로 갈라진 검은 핵. 이걸 잘 봐 두라는 이유는 뭘까...
"별로 특징이 없어 보이는데요?"
"당연하지. 가장 전형적인 녀석으로 일부러 골라서 보여주는 거니까."
"...?"
"16세의 남자 환자입니다. 1986년 11월에 고열을 주소(chief complaint)로 해서 응급실을 거쳐 입원한 뒤 골수
검사 결과 AML로 밝혀져 항암제 치료 했으나 remission이 이루어지지 않아 골수 이식 수술 추천받은 상태입니다."
늘 그렇듯이 무표정한 김병국 교수님.
"골수 도너(제공자)는 누구지?"
레지던트 동운이형은 땀을 쓰윽 닦는다.
"환자의 누나입니다."
"수술 날짜는?"
"다음주 금요일입니다."
"자네도 들어가는 건가?"
"예... 저는 도너 쪽에..."
내과 레지던트가 수술장에는 왜 들어가는가 싶겠지만 골수 이식 수술은 외과 수술이아니다. 마취과와 내과 의사들이 하는 수술인
거다. 수술실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한쪽에는 환자가, 다른 쪽에는 골수 제공자가 누워 있는 거다. 정확히 말하면 골수
제공자는 엎드려 있다. 제공자의 골반뼈에 굵기 3 - 5 밀리 정도 되는 무식한 바늘(바늘이라기엔 좀 굵은... needle이
아니라 trocha라고 부른다)을 꽂아 골수를 뽑아내는 거다. 전신 마취를 하지만 그래도 뼈를 깨어내는 고통을 받는 것은 제공자
쪽이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양쪽 엉덩이에 각각 40번씩 80번을 찌를 예정이라니 수술이 끝나고 골수 제공자가 바로
눕기까지 몇 주 이상 걸리는 게 보통이다.
그러는 동안에 환자는? 환자는 아주 팔자가 편하다. 제공자가 그 고생을 하는 동안 편안히 누워 있으면 된다. 마취 따위는 하지
않는다. 채취한 골수를 정맥 주사를 통해 수혈받는 것이 전부인 거다.. 도대체 누가 환자인지 모를 일이다.
수술 이틀 전, 환자의 몸에 남아 있는 모든 면역 시스템을 죽이는 작업이 시작된다.
'whole body irradation'... 평소에 방사선 치료를 할 때보다 훨씬 많은 양을 쬐어 모든 골수세포를 깨끗이
죽이는 거다. 이제 환자의 몸은 무방비 상태다. 여기에 골수 제공자의 골수세포를 수혈받으면 그것은 혈관을 타고 온 몸을 돌다가
결국 환자의 뼈 속에 정착한다. 이제 새로운 골수가 자라는 거다. 며칠 이내에 환자의 백혈구 수는 정상으로 돌아간다.
수술장. 갓 스물인 환자의 누나는 엉덩이를 드러내고 엎드려 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좋아할 군번은 이미 지났다. 그리고 그 예쁜 엉덩이에 가해질 무지막지한 폭력의 장면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
"시작하시죠..."
한쪽씩 교대로 엉덩이를 찌른다. 그 굵은 trocha가 휘어질 정도로 체중을 실어올라타다시피 누른다. 뼈가 깨어지는 소리.
바늘을 뽑고 주사기에 연결된 튜브를 꽂아 빨아낸다. 골수라는 게 걸쭉하다 뿐이지 겉보기엔 피와 구별이 안 간다.
유리병에 어느 정도 모이면 옆방으로 보낸다. 거기서 골수의 이식(?)이 이루어지는 거다.
그 조그만 엉덩이의 어디에 80번이나 굵은 트로카를 찌를 곳이 있었을까. staire가 보았던 어느 수술보다도 처참하고 피를 많이 흘린 수술이 끝날 때쯤 모두들 땀에 흠뻑 젖었다...
"... 그래서... 수술 경과가 좋은 모양이지?"
"예... CBC(Colligative Blood Cell Count) 결과도 정상에 가깝고 환자의 상태도 거의 만점입니다."
"이게 그 환자의 혈액 샘플일세. 어제 날짜로군... 한 번 볼 텐가?"
김상인 교수님께서 건네 주신 슬라이드를 현미경에 걸고 두 사람은 교육용 현미경에 마주 앉았다.
우선 저배율(100배)로 백혈구를 찾아내고서...
"임파구(lymphocyte)는 안 돼. 중성구(neutrophil)를 찾아보게."
뭐,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다. 제일 흔한 게 중성구니까.
"찾았습니다."
"오케이... 그대로 확대시키게... 1500배까지..."
찾아낸 백혈구를 가운데 놓고 400배, 1000배를 거쳐 1500배까지... 시야는 다시 흐릿해진다. 볼 때마다 신비로움을 느끼게 되는 아찔할 정도의 고배율.
"핵을 자세히 보게. 이제 알겠지?"
그렇다... 이제야 무엇이 문제인지 석연히 보인다... 환자의 백혈구에는 여성에게만 있는, 두 개의 X 염색체 중에서 활성화되지 않은 쪽이 뭉쳐 있다고 하는 그 유명한 작은 덩어리가 붙어 있는 거다.
"예... 알았어요... Barr body가 보입니다. 이건 여자의 백혈구에요..."
몸 속에 여성의 피가 흐르는 남성... 이걸 현대 의학의 기념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괴물을 만들고 만 것일까...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09월04일(월) 05시27분44초 KDT
제 목(Title): 베토벤 8번 - 마지막 페이지는 어디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는 것은
전원교향곡을 듣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다.
- 클로드 드뷔시
1989년이었을거다. 의대 오케스트라 OB인 MPO(Medical Philharmonic Orchestra)의 창단 연주회.
의사들이 대부분인 단원들은 연습 시간에 맞춰 출석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출석률이래야 겨우 절반을 넘을까 말까... 이러니 연습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연주회날까지 악보가 깨끗한 사람이 태반이었으니 (제대로 연습을 했다면 악보는 지휘자의 갖가지 지시
사항으로 지저분해야 한다.) 연주회가 시작되면 어떤 소리가 날지 아무도 장담 못하는 위기 상황. 이런 속에서도 고참 선배님들께선
'우리는 전통적으로 실전에 강해...'라며 마지막 리허설 직전까지 분장실에서 마이티만 치고 계셨다.
리허설이 끝나고 잠시 숨을 돌리는데 정형외과 의사인 어느 선배님께서 부르시는 거다.
"민형이 넌 악보에 잘 적어 놨지?"
"예..." (약간 불안)
"난 이렇게 깨끗하거든... 그러니까 나하고 악보 바꾸자. 넌 다 외었지?"
으으... 후배가 무슨 힘이 있겠나. 선배님의 깨끗하다 못해 손을 베일 정도로 날이선 빳빳한 새 악보를 받아들었다.
연주회는 그럭저럭 넘어갔다. 정말 실전에 강한 사람들인지 어려운 곳은 적당히 뭉개면서 잘도 넘어간다. staire도 제 1
바이올린 말석에 앉아 기억을 더듬어가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곡. 베토벤의 교향곡 8번 4악장만 남았다.
이 4악장은 무지무지 빠르고 복잡하다. 수시로 반복되는 3연음과 8분음표... 잠시 한눈 팔다간 놓치고 만다. 한 번 놓치면 다시 템포를 잡아 끼어들 틈이 별로 없는 것도 문제다. 이래저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거다.
드디어 4악장도 거의 끝나고 이제 마지막 한 페이지만 남았다. 3마디 쉬는 사이에 잽싸게 악보를 휙 넘기고서... 앗!!! 이게
웬 일... 마지막 한 페이지가 감쪽같이 떨어져 나간 거다. 악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남은 건 허연 백지 뿐. 아무리 연습 안
하는 선배라지만 이런 정도일 줄이야...
딴 생각 하고 있을 틈이 없다. 4악장 마지막 부분은 한껏 화려하게 부풀며 피날레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간다. 악보가 없다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는 웃음거리밖에 안된다. 어쩔 수 없이 앞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고 기억을 더듬어가며 쫓아갈 밖에.
격렬한 화음으로 4악장이 끝났다.
'휴... 정말 진땀 뺐네... 어쨌든 끝나서 다행이야...'
간신히 숨을 돌린 staire는 지휘자가 시키는 대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몇 차례 쑥스러운 박수를 받았고...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재난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었다. 눈치도 없는 청중들의 앵콜 요청에 못 이긴 지휘자가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거다.
"앵콜 하지요 뭐... 4악장 후반부... 자아, 준비..."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09월12일(화) 04시50분27초 KDT
제 목(Title): 우선... 좀 오래 된 이야기부터...
지난 6월에 이미 이대 보드에 올린 글이지만
다음 글을 위한 배경삼아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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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울로스에 갔었다.
자정이 지나고 1시가 넘도록 마시고 또 마시면서
13년을 끌어 온 용준이의 사랑을 이야기했다.
녀석이 정민이를 '찍은' 것은 의예과 1학년 때.
늘 정민이 주위를 뱅뱅 돌며 말없는 호소를 정민이에게 실어 보내기를 6년...
그러나 정민이는 그런 용준이의 마음을 알면서도
졸업과 동시에 성규와 결혼했고
그날도 우리는 아울로스를 찾아 용준이의 씻겨내린 6년을 위해 잔을 부딪쳤다.
정민이는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주부 의사가 되었고
성규는 레지던트를 마쳤다.
지난 겨울, 왜 아직 결혼 안 하냐는 내 물음에
'그러는 넌 했냐.' 라며 산낙지를 씹던 용준이의 눈빛은
정민이를 향하던 그 6년간의 뜨거움이 하나도 식지 않았음을 보여주었고...
엊그젠가 한밤에 요란하게 울린 전화,
성규가 머리를 심하게 다쳐 입원했다는...
내가 그를 찾았을 때 이미 성규는 뇌사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좌측 전두엽과 측두엽을 거의 다 들어내는 뇌수술을 받아
회복되더라도 언어장애가 올 것임에 틀림없고
어쩌면 식물인간이 되어야 하는 그는 더 이상 내과의사가 아니었다.
결혼 후 7년, 이미 친구의 아내가 된 정민이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병실을 지켰고
친구들이 모두 성규와 정민이를 걱정하고 있는 그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용준이의 타는 듯하던 눈빛을 떠올리고
남몰래 죄스러움에 몸서리쳤다.
용준이는... 돌아올 것인가
다시 정민이에게 손을 내밀 것인가.
어째서 나는 지금 성규보다도
13년을 골돌아 흘러 온 용준이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는 것인가.
아울로스의 어두운 구석에서
우리는 떠들썩하게 잔을 들었다.
내 눈에 괴어 넘칠 듯한 눈물은
성규를 위한 것도, 용준이를 위한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도 내놓고 말하지 못할 사랑에만 예민한
유치한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그 부끄러움이 울고 있었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09월12일(화) 05시30분21초 KDT
제 목(Title): 다음... 그 뒤의 이야기...
"민형이니? 나 용준이다."
"웬일이냐? 이 시간에..."
"나... 약혼한다... 일요일에. 놀러 와..."
"......"
수화기를 내려놓고서 웃었다.
녀석은 서두른 걸까.
정민이에 대한 미련의 싹이 다시 자라는 것이 두려웠을 게다.
한동안 결혼 안 할 것같던 녀석이 선 본 지 2주만에 약혼을 선언하다니...
장마비가 퍼붓던 어느 주말, staire는 함을 지게 되었다.
좋은 날 언성 높이고 얼굴 붉히는 건 피차 원하지 않는 일이라
함은 쉽게 쉽게 들어갔고
우리는 아울로스 대신 그 아가씨의 집에서 다시 잔을 들었다.
11시... 다들 추스리고 일어나는 시간에 용준이가 어깨를 짚는다.
"넌 조금 기다려라..."
"?"
꼬냑을 두 잔 이상 마시면 즐길 줄 모르는 거라던가?
그러나 우리는 2시간동안 둘이서 두 병을 비웠다. 두 시간, 둘이서, 두 병...
"무슨 얘길 하고 싶어? 신부 댁에 실례일텐데..."
"괜찮아. 지금 친구들이랑 함 열어보고 있으니까 한참 걸릴 거야.
여자들은 보석이나 옷 보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지?"
"......"
"민형이 너... 앙드레 말로의 인간 조건... 기억하냐? 거기 배경이 어디더라?"
"상해... 서구화의 물결을 제대로 타지 못하고 뒤뚱거리던..."
"오늘 저녁 이 집은 어때?"
짜식... 알 것도 같다.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중국 영화는
한결같이 화려하지만 어딘가 텅 비어 있는 상해를 배경으로 삼아
떠도는 인간들을 그리고 있지.
함에 든 것은 한복과 비녀, 반지, 노리개...
그렇지만 둘이 마주 앉아 마시는 테이블에는 꼬냑과 훈제 연어. 치즈와 아몬드.
'복'자가 새겨진 은수저와 미끈한 곡선의 포크...
양복에 금시계를 찬 용준이와
가짜 달비에 댕기를 드리고 한복을 입은 그 아가씨...
"그래서... 넌 동서양 문화가 억지스럽게 짜맞춰진 결혼 풍속이 불만이냐?"
"아니... 처음엔 뭐가 불만인지 몰랐어. 그냥 싫었지..."
"......"
"이제는 알겠어... 이건... 졸부들의 돈지랄이야..."
저 녀석... 자기 장인어른을 향해 졸부라니...
"내가 왜 이런 비싼 양복에 금시계를 차야 하지?
내 능력으로는 어림없는 패물을 뭣때문에 선물하는 거지?
이건... 단지..."
그래... 무슨 말인지 안다.
의예과 시절, 아침마다 서로 다짐하던
'후진국 학생은 5시간 이상 잠을 자면 안 된다...'
'후진국 학생은 하루에 8시간 이상 공부해야 한다...'
'후진국 학생은 맥주를 마셔서는 안된다...'
치기만만하지만 맑았던 우리의 눈은 어느새 꼬냑 위에 흐릿하게 비치는구나...
"용준아..."
"......?"
"하지만 네 결혼이야..."
"알아... 너는 정민이 때문에 더 걱정스러운 거지?"
"......"
"걱정하지 마... 내 결혼을 소중하게 지킬 거야."
그래... 깨끗이 씻겨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
같이 씻어내볼까?
......
둘이는 밤새 퍼붓는 빗속을 같이 걸었다.
용준이의 새 양복과 staire의 윗주머니에 든 디스켓이 후줄근해지도록...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09월22일(금) 15시00분45초 KDT
제 목(Title): 13째 딸의 이야기
양심적인 의사는 환자와 함께 죽어야 한다.
만일 함께 치유될 수 없다면...
- 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
벌써 2년이나 묵은 사진. 의예과 1학년 때 친구들이랑 롤러 스케이트장에 가서 찍은 조그만 사진 속에서 13째딸 유정이는 약간 놀란 듯한 표정으로 렌즈를 향하고 있었다.
- 아빠, 오랜만이에요. 요즘 바쁘신가봐요?
- 저도 밤늦게 술마실 수 있는 건 오늘까지에요. 다음 주부터는 시험 준비해야 하거든요. 아시죠? 본과 1학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 신경해부학이 너무 재미있어요. 저는 나중에 신경외과 할 거거든요.
'신경외과? 외과 중에서도 가장 격한 곳이 흉부외과랑 신경외과라는 건 알고 있지?'
- 그럼요...
'유정아... 내가 남녀 차별하는 건 아니지만 여자 외과의는 쉽지 않아. 서울대병원에서는 외과 레지던트로 여자는 받지 않는걸.'
- 가끔은 받지요. 아주 가아끔...
- 알아요. 체력과 끈기... 하지만 제가 그렇게 허약해 보여요?
'......'
'본과 1학년은 아직 그런 거 생각하지 않아도 돼. 배우다보면 더 재미있는 건 얼마든지 있거든. 인턴 마치고서 생각이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아...'
- 그래도 저는 신경외과 할래요. 고등학교때부터 생각했어요.
- 아는 분의 아들이 뇌수종(hydrocephalus)이었어요. 병원에서도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했고 결국 반 년을 넘기지 못했지요. 귀여웠는데...
'그런 애는 살아도 정상인이 될 수는 없는 게 보통이야...'
- 의사에게는 우선 생명을 살리는 것이 먼저 아닌가요? 장애인으로라도...
'그래... 거기에서 너하고 나는 크게 다르지... 나는 안락사를 시킨 적도 있는걸.'
- 저, 잘 해낼 거에요. 아빠한테 이 얘길 하는 건 나중에 제가 움츠러들 때마다 저를 혼내 주셨으면 해서에요. 맘 편히 유학 다녀오세요. 그때까진 신경외과 의사가
되어 있을 거에요. 자, 약속...
'......'
웃으며 유정이를 보냈지만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그애도 알고 있겠지.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하는 길이 얼마나 험하고 외진 곳인지.
사진 속의 열 세째를 모처럼 눈여겨 본다.
전에는 몰랐던 희미한 미소가 유정이의 입가에 감돌고 있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09월25일(월) 21시56분37초 KDT
제 목(Title): 간호원 이야기 - 약혼자의 의사 complex
나는 순간적으로 진실을 폭로하는 실언이라든지, 시선의 엇갈림을 훔쳐본다든지,또는 번개같은 직감 따위를 믿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항상 나를 놀라게 하는 말이있다. "그래서 당장에 그녀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고 하는 류의 말이
그렇다.
- 사강, '어떤 미소'
(제목을 보고 뭐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정식 명칭은 '간호원'이 아니라 간호사라고. 하지만 이 일이 일어났던 87년엔
아직 그들은 간호원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조시대의 이야기를 하면서 병조 판서를 국방부 장관이라고 부를 수는없지 않은가...)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도서관을 나서던 staire는 도서관을 끼고 도는 어두운숲길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나직한 목소리를 주고받는 두 남녀.
'데이트족인가? 가만... 저 아가씬 우리 병동의 윤영미(가명) 간호원이잖아.'
"그래서? 내가 밤에 잘 못 나오는 거 자기도 잘 알잖아.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거 들키면 난 모가지라는 거..."
하긴 그렇다. 오후 근무하는 간호원이 밤 10시에 여기에서 데이트라니...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87년 당시 서울대 병원의 간호원은 3교대 근무...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는 아침조, 오후
4시부터 자정까지인 오후조, 자정부터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 8시까지 일하는 야간조가 있어 24시간 빈틈없이 돌아간다.
일주일이나 2주일이 지나면 조를 바꾸어 또 쳇바퀴 돌듯이 일하는 거다. 그러다보니 간호원들은 소화불량이나 불면증은 기본이고 예민한 사람의 경우엔 생리불순으로 고생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사랑 싸움인가? 우리가 실습할 때 한눈 팔기라도 하면 막 야단치는 저 깐깐한 사람이 근무시간에 데이트라니... 하하...'
"잘났군... 그 잘난 직장 당장 때려쳐! 이건 이름만 약혼자지 얼굴 한 번 볼 수가 없으니..."
"자기, 질투하는 거야, 지금? 웃긴다, 정말..."
"그래, 질투다. 너는 웃기지? 난 미치겠다구... 밤이면 밤마다 그 잘난 의사놈들이랑 시시덕거리는 거 알면서 질투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
"이건 일이야. 간호원이면 누구나 하는 거라구. 내 일, 그렇게 우스운 이유로 포기할 수 없어."
"뭐가 우스운 이유야. 너같으면 내가 한 달에 열흘씩 여직원들이랑 야근한다면 질투 안 하겠냐? 그것도 그 잘나가는 의사놈들이랑..."
"의사 의사 그러지마. 나 의사에 눈먼 여자 아냐. 그랬으면 의사랑 결혼했지..."
"그래? 눈 안 멀었지? 그럼 당장 관둬! 이렇게 불안하게는 못 살아. 내가 아무리 별볼일 없지만 의사처럼 떼돈은 못 벌어도 너 밤일 안 시킬 자신은 있어. 당장 때려치란 말야!"
숲 그늘에 가만히 앉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staire는 살며시 가방을 집어 들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간호원들만의 아픔이 이런 예상 못한 곳에 또 하나 도사리고 있었다니...
...
그 다음 주엔가 윤영미 간호원은 성대한 환송식을 받으며 병원을 떠났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09월30일(토) 05시12분45초 KDT
제 목(Title): 가끔 하는 거짓말 2
* 시위를 마치고 같은 전철을 탔던 어느 젊은 학생의 상기된 얼굴,
그의 형형한 눈빛이 바래어 가는 오랜 기억 하나를 떠올리게 해 주었습니다. *
90년대 초의 어느날이었습니다.
'민자당 해체의 날'이라는 이름의 시위가 있기 전날.
의대 오케스트라 후배인 정현이('의대생의 사랑'의 주인공 정현이입니다.)와 함께 대학로에서 소주를 마시며 밤을 지샜습니다.
다음날 아침, 제가 자취하던 집에 데리고 가서 아침을 먹고 이제 정현이는 자신의 집으로,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참이었습니다.
"형은 오늘 가투 나오실 거에요?"
"물론이지... 잘하면 종로에서 보겠구나."
정현이의 얼굴에 뭔가 흘낏 스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말없이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그냥 그러고 서 있었지요.
약간 상기된 정현이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형... 오늘 거리에서..."
"...?"
"... 다치지 말아요... 알았죠?"
staire는 책장에 줄을 지어 서 있는 손가락만한 12지신상을 잠시 바라보았습니다.
중국에 갔다 온 누군가가 선물한 12마리의 동물은 이제 8마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staire는 한 마리를 집어들었습니다. 닭이었을 겁니다.
"정현아... 이건 행운의 부적이야. 선물받은 건데..."
정현이는 돌로 만든 조그만 닭을 받아들었습니다.
"평생 간직할 생각 하지 말고... 나중에 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해. 하지만 오늘은 누구에게도 주지 말고 꼭 갖고 있어야 해. 알았어?"
이제 7마리가 남았습니다. 다섯 번째의 거짓말이었죠.
사당역에서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staire는 신림동, 정현이는 잠원동을 향해 플랫폼에 마주보고 서 있었지요.
정현이가 타고 갈 차가 먼저 오려는지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순간,
"형, 이거 받아요!"
정현이는 맞은 편의 staire를 향해 무언가를 던졌습니다. 두 손으로 간신히 받아 든 그것은... 조금 전에 정현이에게 주었던
닭이었습니다. 어리둥절한 staire를 향해 정현이는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두 손을 입가에 모은 채...
"형,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오늘 정말 다치시면 안돼요!!!"
전차의 굉음에 그의 목소리가 지워져 가고 있었지만 정현이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로 전차가 미끄러져 들어왔습니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12월05일(화) 23시32분32초 KST
제 목(Title): 뒤늦게 쓰는 영화 전태일 감상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있을까
분홍빛 고운 꿈나라
행복만 가득한 나라
하늘빛 자동차 타고
나는 화사한 옷 입고
잘생긴 머슴애가
손짓하는 꿈의 나라
이 세상 아무데도 없어요 정말 없어요
살며시 두 눈 떠봐요
밤하늘 바라보아요
어두운 넓은 세상
반짝이는 작은 별
이 밤을 지키는 우리
힘겨운 공장의 밤
고운 꿈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뿐
하지만 이젠 깨어요
온 세상이 파도와 같이
큰 물결 몰아쳐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 김민기, 이 세상 어딘가에
금년에 본 첫번째 영화, 그리고 아마도 금년에 보는 마지막 영화가 될 것같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잡념으로 가득한 staire는 영화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손을 씻을 데가 없어요라며 울던, 손으로 각혈을 받아내던 여공의 해쓱한 얼굴이 10년도 더 지난 어느 여름날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시대 1985년. staire는 신도림동에서 야학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본과 1학년이라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었지만 84년부터 알게 된 학생들과의 정을 끊기는 쉽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한 아이, 자그마한 키에 핼쓱하고 여윈 선아라는 여공은 staire를 무척 따르는 편이었다.
선아에게서는 가끔 편지가 날아오기도 했다. 화사한 빛깔의 편지지와 약간 모가 져있긴 해도 예쁜 글씨에서는 그녀의 궁핍한 모습을 전혀 엿볼 수 없었다. 어느날의
편지 끄트머리에 붙은 한 구절, 이만 쓸께요. 불빛이 흐려서 눈이 아프거든요...
를 읽으며 비좁은 방에 쪼그리고 앉아 30촉 알전구의 침침한 불빛 아래 편지를 쓰는 선아의 모습을 떠올리긴 했지만.
한여름이었다. 방학을 맞은 staire가 안심하고 야학에 다시 참가하게 된 85년의 여름.
수업을 하다가 선아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걸 보았다. 피곤한 몸으로 수업을 듣는 공원들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그냥 못 본체하며 넘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옆자리의 진경이가 그러는 거다.
"선생님! 선아 울어요. 아픈가봐요."
저런... 그러고보니 앞으로 옹송그려진 선아의 아랫배에 두 손이 가 있고 어깨가 들먹이고 있었다.
"선아야... 왜 그러니? 어디가 아파?"
"... 배가... 배가 너무 아파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선아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솔직이 말하자면 선아는 전혀 배가 아픈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던 거다. 하얗지만 까칠한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소리를 죽여 들먹이는 조그많고 동그란 어깨... 그건 격한 고통에 못이겨 우는 모습이라기보다는 깊은 서러움에 의한 울음으로 보이는 거다.
어쨌든 선아를 들쳐업고 가까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 얼마나 기다렸을까. 의사 선생님이 staire를 불렀다.
"저 학생이랑 어떻게 돼요?"
"제가 가르치는... 야학에서 가르치는 아입니다."
"선생님인 셈이군요."
"예..."
"저 학생은... 배가 아픈 게 아니에요."
"????"
"빈혈 기미가 있고 호흡기에 이상이 있는 것같긴 하지만 배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럼 왜...?"
"저 학생은 지금 누군가의 관심을 끌고 싶은 거죠."
"그럼 꾀병입니까?"
"꾀병은 아닙니다. 진짜로 아픈 거에요. 신경성이니 하는 것과는 종류가 다르지만 비슷하게 생각하면 돼요. 집안이 별로 윤택하지 못한 모양이죠? 가족 관계도 별로 좋지 않고."
집안이야 단칸방에 홀어머니와 남동생이랑 살고 있으니 윤택은커녕 빈민이라고 보는 게 옳겠고... 술과 도박과 가족들에 대한 손찌검으로 생애를 탕진한 끝에 공사판에서 죽은 아버지와 건달의 길로 빠져들고 있는 국민학교 6학년 남동생, 봉투를 붙이며 생계를 잇고 있지만 궁벽한 생활에 찌들어 잔신경질을 부리는 어머니...
"맞습니다..."
"그래서 아마 야학 선생님들이 이 학생에게는 딴 세상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지요. 관심을 갖고 가까이 대하고 싶지만 맘대로 안되는... 꾀병하고는 달라요. 심리적인 통증이죠. 서운함과 상실감, 패배감... 이런 것들로 인해 위축된 사람은 자연히 움츠리게 됩니다. 배를 쓸어안게 되지요. 마음이 무거우니 어쩐지 배도 아픈 것같아요. 묵직하게. 그래서 더 움츠러들고 그럴수록 더 아픈 것같지요. 거기에다 심리적인 효과로 서러움이 가세를 하게 되고... 나중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상상의 고통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요. 악순환이죠. 누가 끊어주기 전에는 스스로 빠져나오기 힘든..."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글쎄... 난 의사지 카운슬러가 아니니까... 일단 그 학생을 잘 대해주도록 해요. 참, 그리고 호흡기 쪽은 조금 더 검사를 해봐야 하겠군요..."
그날 선아는 응급실 침대에 누워 staire의 손을 꼭 잡고서 밤을 보냈다. 여윈 얼굴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을 내려다보며 손에 힘을 주었더니 이미 잠든 줄 알았던 선아도 수줍게 되쥐어 주었다. 선아의 입가에 미소가 스친 것같았다...
......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아니, 조금 더 그 뒷이야기가 있지만 간단히 요약하기로 하자. 선아는 결핵을 앓고 있었다. 진단이 나온 즉시 직장을 잃은 선아는 그녀의 신도림동 단칸방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사라져버린 거다. 어디로? 돌아갈 고향 같은 것도 따로 없는 선아가 어머니와 동생을 두고 어디로 가버렸는지, 이제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이분이 자신의 뜻을 다 펼치지 못하시고 돌아가신 것이 너무나 가슴아프지만,
그나마 위안으로 남는 것은 이렇게 이 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전해주고 있다는 것 아닐까?
부디 편하시길 바라면서....▶◀
4Q 시작....ㅜㅜ
12월 13일 : 미생물학 실습 시험.
12월 14일 : 약리학 실습 시험.
12월 18일 : 기초면역학 시험.
12월 20일 : 대사학 시험.
12월 22일 : 약리학 시험.
12월 26일 : 미생물학 시험.
12월 28일 : 병리학 시험.
12월 29일 : 행동과학(2) 시험.
벌써 또 시험기간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본1의 마지막 시험...
이것이 끝나면...겨울방학...그리고 새해...
조금만 더 힘내서 후회없도록......!
마치 집과 함께 자기를 버리고 간 주인을 기다리는 느낌을 주기에...
순간 카메라로 손이 가서 찍은 사진...
사실 개 주인은 바로 옆 슈퍼 주인이라는... -_-ㅋ
겨울의 느낌을 잡아보려고 했던 것이라는..약간 아쉽네;;
구도도 그렇고....색감도 아쉽군.....ㅠㅠ
(저 가운데의 기둥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감은;;;)